민주화의 초석/경제실책 컸다(노태우정권 5년:4·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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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론/「과거」단절 급급… 빛잃은 통치권위/정책 일관성없이 인기만 뒤쫓아/김용서 이대교수·정치행정학
이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정착되고 있다. 달성하고 나면 당연한 듯해도 얼마나 힘든 목표였는가. 건망증이 심하고 잘 변하는 대중의 여론은 믿을 것이 못되는가. 퇴진하는 대통령은 권력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느끼리라.
그렇기에 한 정권의 업적을 평가하는데는 엄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우선 통치기간을 통해 상황인식과 역사의식이 정확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둘째,올바른 전략을 세웠는가. 셋째,전략과 정책의 추진과정에서 오류는 없었는가. 마지막으로 과거의 정권들보다 무엇인가 개선되고 향상된 것이 있는가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노태우대통령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은 기준에서 볼때 우선순위가 뒤바뀐 점과 그 추진방법상의 문제점 및 결과적인 병리현상 때문이다.
우선 상황인식의 면에서 「민주화」도 「북방정책」도 모두 정치적 고려가 앞선 것이 문제였다. 노 대통령은 집권당시 우리의 경제가 탄탄대로인 것으로 착각했다. 그때 겨우 본궤도에 진입이 시작된 경제적 발전이 실속되지 않도록 전력을 투구했어야 했다.
그다음 순위로 국민의 의식과 태도를 서서히 민주적으로 변화,유도시키는 교육정책과 언론정책이 뒤따라야 했다.
「민주화」는 세번째 순위정도로 국민의식과 상황의 변화속도에 맞춰가도록 선도·관리했어야 했다. 국민의 여론이란 한번 고삐를 놓치면 통치기반이 흔들기고 만다. 그 다음은 혼란뿐이다.
북방정책이나 남북관계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안정수지타산을 먼저 생각했다면 그처럼 문외한의 모험을 자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큰 이득이 없는 국교나 허세로 손해보는 정치적 교류는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조급한 공명심과 인기주의는 후회만 남긴다. 들뜬 마음에서는 상황이 정확히 보일리가 없고 역사의식 운운할 처지가 못된다.
통치전략의 측면에서도 노 정권은 과거(권위주의)와의 단절과 차별에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통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회질서와 안정을 얻을 수가 없었다.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정권이라는 의식은 전두환 전 대통령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도기에 불가피하게 분출되는 온갖 요구와 갈등을 통제하기 위해 권위주의방식을 취했다. 여러 면에서 그는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유사성 또는 「연속성」속에서 개선을 촉구했다. 안정과 경제발전이 그냥 행운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전 전대통령도 남북통일이 민족의 비원이고 정권의 최대과제라 생각했다. 그도 남북정상회담의 영광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반정부세력과 북한의 속성을 신속히 간파하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끝없는 미련때문에 북한과 국내의 반체제세력을 크게 고무 육성시키고 정치적 혼란을 자초했다. 대신 체제옹호세력을 좌절시키고 보수진영을 분열시켰다. 경제는 물론 그 이외의 의식상의 국력까지 소진시킨 결과가 되었다.
정책추진과정에 있어서도 노 대통령은 정책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했다. 전정권도 인기주의적 속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정권에는 못미쳐도 정책이 일관성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솔직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많은 다른 약점을 보완시켜주었다.
노 대통령은 우선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중간평가를 패배의 두려움 때문에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일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붙으면 국민들의 협조는 포기해야 한다. 그때부터 국민과 정부는 제각각 다른 세계가 된다. 나라가 지리멸렬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노 정권의 경우는 정책을 인기위주로 깜짝쇼처럼 밀어붙였다. 과거와의 단절과 차별을 중시해 연속성없는 생소한 정책이 급작스럽게 추진되기 일쑤였다. 그 결과는 우선순위가 흐트러지고 혼란이 왔다. 엄청난 시행착오로 비용이 증대되고 귀중한 시간이 낭비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역감정 해소를 외치면서 권력과 온갖 이권을 TK중심의 지역적 편향과 측근중심으로 배분했다. 그러나 위선속에 부패가 서식했다. 정권을 인계해준 정치적 은인을 귀양보내는데는 못본척하고 「6·29민주화선언」은 자기 것이라고 선전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자 침묵을 지켰다. 더구나 전정권의 친·인척 비리를 신랄히 비난하다가 스스로 인척비리를 만들어갔다. 토지매각(수서)의 특혜시비와 재벌의 거액헌금이 폭로되는 단계에 이르러 그는 정직하지 못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
조급한 한소접근으로 한미,한일관계를 소원시켰고 한중접근은 한­대만관계를 불편케했다. 새친구를 만들려다가 옛친구를 잃은 격이다. 외교적으로 강대국에 이용당하고 소외되고,위태롭게 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경기침체·물가고·교통마비·무역적자·과소비·범죄증가·기강붕괴·가치관의 혼란·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분열 및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모든 총체적 난국과 국력쇠퇴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는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과거정권에 비해 향상된 것이 무엇인가 자문하게 된다. 변한 인심이 야속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정말 바로알게 된 것 뿐이다.
다행히 새대통령은 「솔직한」결단의 리더십을 가졌다는데 기대가 크다. 그러나 그 역시 인기를 위한 과거와의 단절은 금물이다. 허세도 안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국민을 통합시키는 능력이 중요하다. 정책결정에 있어서도 효과를 생각하되 부작용을 먼저 측정해야 한다.
지금은 위대한 업적을 위해 급히 서두르는 대통령보다 능력의 한계를 알고 정확한 상황판단으로 철저하게 다져가는 대통령이 필요한 때다.
◎옹호론/평화적 정부이양·인권개선 기여/북방정책 큰 성과 국제위상 높여/김학준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노태우대통령이 이끈 대한민국 제6공화정 제1기 5년은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성취를 기록한 시기였다. 그 첫번째 성취는 권위주의체제로부터 민주주의체제로의 전환이다. 6·29선언에서 9·18결단으로 이어진 일련의 민주화 조처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선진민주국가들에서처럼 하나의 민선정부로부터 다른 하나의 민선정부로의 평화적 정부이양이 가능하다는 관례를 확립시킨 것이다.
이제 정부선택권은 확실하게 국민의 손에 돌려졌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정권을 장악할 수 없게끔 우리의 역사는 전진한 것이다.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이야말로 가장 큰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와 동시에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들이 충실하게 마련되었다. 삼권분립의 원칙아래 의회의 힘은 커졌으며 사법부는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언론은 권력으로터 자유로워졌으며,국민의 인권상황은 전반적으로 크게 개선됐다. 지방자치제의 초석도 놓여졌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이제 민주국가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 두번째 성취는 경제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5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은 2∼3배로 커졌으며 그리하여 국민총생산은 세계 19위에서 15위로 올라섰다.
1인당 국민소득 역시 2.2배로 늘어났으며,반면에 순외채는 87년도 대국민총생산 17.4%에서 4.5%로 크게 줄었다. 주택에 있어서는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지난 5년동안 무려 2백65만가구의 새로운 주택이 건설된 것이다. 주택보급률도 당연히 향상돼,지난 5년사이에 69.2%에서 77.8%로 높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주택가격이,그리고 부동산가격이 지속적으로 안정되고 있는데,그것은 경제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도 값지게 평가될만 하다.
이와 동시에 우리 경제의 선진화를 위한 구조조정작업이 끈기있게 추진되었다. 특히 사회간접자본 예산을 87년 대비 92년 현재 3.5배로 늘렸는데,같은 시기 대비 일반회계예산이 2.1배 늘었음을 감안한다면 지난 5년동안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재정투자를 얼마나 크게 확대시켰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농어촌구조개선을 위해서도 91년부터 10년동안 42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획기적 정책을 추진해왔다.
국제경쟁력의 강화를 위한 제조업경쟁력 강화대책도 꾸준히 추진해왔다. 이에 따라 국민들이 걱정하는 무역적자의 문제에서도 개선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여러가지 가슴아픈 일들이 많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국민들의 물질생활의 형편은 꽤 좋아졌으며,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선진경제로 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 세번째 성취는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높인 일이다. 노 대통령이 「민족자존의 시대를 연다」는 역사관아래 서울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정력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결실로 지난 5년동안 우리나라와 수교한 나라는 무려 46개국에 이른다. 이 나라들의 면적을 다 합치면 제1공화정으로부터 제5공화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과 수교한 나라들 모두의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넓다. 5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참으로 경이적인 규모의 새로운 활동무대를 우리 국민에게 마련해준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국제연합에 북한을 동반해 가입할 수 있었다.
북방정책의 이러한 열매들은 남북한관계의 개선을 뒷받침했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리기에 이르렀고,남북한 사이에 비록 제한된 규모에서나마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가 증대되어 왔다. 북한의 군사노선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의 견제도 강화됐다. 물론 지난해 후반기부터 북한의 무모한 핵개발정책이 걸림돌이 되어 남북한관계는 소강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북한이 탈이념의 화해와 협력을 기조로 하는 국제적 조류를 끝까지 거역하기는 어려울 것이며,따라서 남북대화의 광장으로 다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노 대통령 5년의 치적들을 몇 부문을 중심으로 개관해 보았다. 잘못한 일들도 있었고 국민들에게 송구스러운 일들도 있었으며 아쉬운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큰 흐름을 놓고 볼때 짧은 격동기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러한 업적들이 어울려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정치적 과격주의의 약화,또는 쇠퇴와 정치적 합리주의의 정착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앞으로는 결코 헌정중단이 없을 것이며 의회민주주의와 문민민주주의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경제생활의 실질적 향상,서울올림픽의 성공이후 명백해진 불가역의 국제적 긴장완화 및 한국사회의 국제화는 명백한 업적이다.
또 남북한 관계개선 가능성의 본질적 증대 등이 정치적 광신주의를 포함한 정치적 과격주의를 크게 약화시킴과 아울러 시민사회의 등장속에서 정치적 합리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정치에 있어서 큰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 정치도 서방의 후기산업화사회에서 나타나는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곧 생활정치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신한국」으로 새롭게 건설되고 종당에는 21세기를 전후해 통일국가로서 태평양시대를 이끌어나가는 지역적 중심국가가 될 수 있는 착실한 토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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