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출범 징검다리역(노태우정권 5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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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화정착에 기여… 외국에선 후한 점수/떼밀려가는 정책에 뒤처리 “어정쩡” 비판
노태우정권 5년이 오는 24일 자정으로 막을 내린다. 노 대통령은 군정 및 권위주의 통치의 끄트머리에서 문민정부 출범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정권을 이끌어 왔다.
노 정권은 문자 그대로 권위의 붕괴와 과도기적 갈등,구시대의 청산과 기득권의 반발과 무질서라는 새로운 현상들에 날카롭게 부대끼며 지내왔다.
노 대통령이 그러한 역사적 과제와 전환앞에서 어떤 통찰력과 지도력을 발휘했느냐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또 국내에서는 비판론이 우세한 반면 외국에서 주는 점수는 비교적 후한 편이다.
예를들면 국내에서는 그와 정치노선을 같이했던 박준규국회의장 같은 이까지도 『노 정권 5년간 국민적 절제의 상실,부정부패의 심화,비관적 경제현실 등을 볼때 귀중한 것을 잃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같은 관점은 대체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민주화를 빼면 내치에 관한한 대체로 어두운 평가가 많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아시아전문가인 스칼라피노박사가 『경제발전을 촉진하면서 민주주의 발전에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될 것이며 북방정책의 성공도 기억될 것』(뉴스위크지 2월10일자)이라고 말한데서 보듯 외국의 시각은 비교적 긍정적이다.
이같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노 정권은 ▲본인이 의도한대로 됐는지의 여부를 떠나 어쨌든 민주주의의 정착과 신장에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고 ▲북방정책에 성과를 거둔 반면 ▲부패구조의 심화와 사회기강의 해이 등 새로운 부담을 만들어 ▲그결과 경제를 한층 어렵게하고 국가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노 대통령은 상황을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타개하는 쪽보다는 상황에 떼밀려 왔다는 평가를 그를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책 또는 사건·상황이든 항상 뒤처리가 간명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어려운 국면을 계속 조성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5공 청산과 지자제문제,3당합당과 그에 따른 내각제 파동 및 민자당의 권력투쟁은 노 대통령 특유의 어정쩡한 자세로 인해 어떤 정파도 만족시키지 못한채 한동안 혼란과 불안으로 내몬 측면이 있었다.
노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이같은 입장을 「과도기의 벼랑끝 인내론」을 내세워 정당화하고 있다. 『물태우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참았다. 그랬기 때문에 정치든,사회단 간에 이래서는 안된다는 자제력이 복원되고 있는 것』이라고 변호한다.
타협과 양보에 인색한 우리국민의 정서와 과도기 현상임을 고려할때 강한 지도력의 행사가 반드시 능사였을까에 대해선 다른 해석이 가능하며 노 대통령측의 주장에 수긍가는 일면도 있다.
실로 노 정권 5년간 정치는 무상하게 변전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변화는 사회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민주화의 정착 조짐이다.
92년의 3·24총선과 12·18대선에서 민주화 자체가 쟁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의 최대과제였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음을 반증한다. 「독재」 또는 「권위주의잔재」라는 일부 비판세력의 설 땅이 두드러지게 위축되고 있음만 봐도 알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물론 군의 정치적 중립도 획기적 진전을 이룩했다. 이런 점은 어쨌든 노 대통령의 중요한 치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자신의 중요한 정치공약을 지키지 않고 정계를 자의적으로 개편해 정치혼란을 필요이상 야기,대가를 너무 비싸게 치렀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6공 출범초기 여소야대의 4당체제는 「구국적 결단」이든,「야합」이든 간에 양당체제로 변했고 후반에 다시 「여소야대의 3당체제」가 되는 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노 정권은 자치단체장선거와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은데다가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여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그에 덧붙여 대통령주변이 관련된 수서사건 등의 비리로 노 정권의 도덕성은 적지않게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정주영현대그룹의 총수가 노 대통령의 치부를 폭로하고 금력을 앞세워 권력을 넘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낳고 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이 그의 재임중 권위주의 통치방식을 몰아내려 노력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확실히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물태우」라는 모멸적 비아냥에도 노 대통령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될때까지 인내하는 새로운 권력자상을 창출했다. 이같은 모습은 때론 지나쳐 출범이전 민주화합추진위에서 마련했던 광주문제의 해결책이 아직도 전면적으로 실행되지 않는 등 우유부단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정치·사회적 통합과 관련해 문제점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점은 노 대통령이 지나치게 TK중심의 인사정책을 폈다는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또 사건·사고가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 너무 자주 개각을 해 각료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 남짓이라는 기록을 수립,정책기조의 일관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노 대통령은 궁극적으로는 보수세력의 결집성격이 강한 3당합당을 통해 여당에 의한 정권재창출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민자당 탈당 및 현승종 선거중립내각의 발족 등 미증유의 유영법을 구사해 김영삼차기대통령이 「정권쟁취」라고 주장해도 반론을 펴기가 어렵게 돼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비서관이 연루된 연기관권부정선거,사돈회사로 낙착됐던 제2이동통신 실수요자선정 등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떼밀려 다니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런 것마저도 민자당의 계속 집권으로 인해 과도기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 쪽으로 긍정적인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관권선거의 나쁜 전통을 없애고 정통성있는 새로운 문민정부를 탄생케한 기폭제가 되었다는 뜻이다.<김현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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