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이 밥을 이길 수 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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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02면

신상옥 감독(왼쪽)과 여배우 최은희.

신상옥(1926~2006)이란 이름은 한반도에서 꽤 독특한 울림을 줍니다. 남과 북을 오가며 영화를 찍은 감독이니까요. 한창 날이 퍼렇게 선 이념대립의 양 진영을 넘나들었으니 참 통도 크지요. 먼저 북으로 간 부인이자 여배우인 최은희씨를 좇았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망명객처럼 살던 그였지만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란 평가는 빛이 바래지 않았습니다.

순화동 편지

신 감독의 대표작 다섯 편을 묶은 DVD가 나왔다 해서 다시 한번 그이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선보인 ‘한국고전영화컬렉션’ 시리즈로 ‘로맨스 빠빠’(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벙어리 삼룡’(1964), ‘천년호’(1969)를 수록했네요. 신상옥 감독과 그의 영화세계를 다룬 50분짜리 다큐멘터리가 붙어 있다니 한번쯤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8월 10~14일 공주에서는 ‘2007 공주 천마 신상옥 청년영화제’도 열린다네요. 그의 영화정신을 기리는 청년 영화인을 발굴하겠다는 게 이 영화제의 목표랍니다.

신상옥의 영화를 몇 편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 ‘쌀’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대인 1960년대 중반 작입니다. 때는 한국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아직도 사람들 가슴마다에서 피 흘리던 50년대 말.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주인공 용이(신영균 분)는 가난에 절어 어둡고 캄캄한 고향 마을을 한번 일으켜 세우겠다고 용을 씁니다. “한평생, 쌀밥 한 번 못 잡수시고 두 눈 뜨고 돌아가신 아버님…” 부친 임종 자리에서 오열하는 용이에게 쌀은 철천지 원수이자 사나이 목숨 걸고 정복해야 할 과제였죠. 산에 굴을 뚫어 금강 물줄기를 끌어들이면 쌀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용이의 야심 찬 계획이자 꿈이지요.
하지만 맨주먹으로 바위굴에 도전한 용이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가가 세 잡으면 이가 집에, 박가가 세 잡으면 박가 집으로” 끈을 대 출세가도를 달려온 마을 유지의 훼방은 시작일 뿐입니다.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까지 걸쳐 있는 영화 ‘쌀’은 구리디구린 한국 정치상황을 시시콜콜 드러냅니다.

신 감독의 ‘쌀’은 막 태동하고 있었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킵니다. ‘쌀’이 계몽영화이면서 국책영화처럼 보이는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이 60년대산 흑백영화는 마음속 깊은 곳을 찌르는 진실한 목소리가 있어 잊히지 않습니다. ‘없어서 못 먹고, 안 줘서 못 먹던’ 시절에 쌀밥 한 그릇에 목맸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목숨 같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쌀(밥) 앞에서 남과 북이 따로 없구나’ 싶은 거지요.

신상옥 감독이 더 오래 살아 급변하는 오늘의 남북 상황을 보면서 새 영화를 찍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이념이 밥을 이길 수 있을까…. 아직도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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