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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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함흥 얄개」「청진 망나니」「남포 깍쟁이」「평양 노랭이」….
북한사회는 이 은어에서 읽을 수 있듯 정권의 양대 인맥을 이뤄 왔던 함경도·평안도 출신 사이에 지방색의 골이 무척 깊다. 최근 들어선 당국의 지속적인 봉합 책으로 색깔이 다소 엷어졌지만 아직 두 지역간의 앙금은 두텁게 남아 있다.
예컨대 함경도·평안도 토박이들은 지금도 당·정·군의 노른자위를 독차지, 다른 지방의 질시를 받으면서도 서로 간에 눈 물밑 권력 암투로 불똥을 튀긴다고 귀순자들은 전한다.
게다가 두 지역 주민들조차「지방주의 타파」라는 당국의 시퍼런 서슬에도 아랑곳 않고 서로 혼사를 꺼리는 등 지방색 잔재는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출신성분」이 나쁜 수도권 주민들을 산간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평양과 다른 지방과의 새 갈등 양상까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게 귀순자들의 얘기다.
그러면 북한 지방색의 뿌리는 무엇일까.
귀순자들은 한결같이「함경도 제일주의」를 꼽는다.
함경도 사람들은「니전투구」나「북청 물장수」로 상징되듯 끈질기고 생활력이 강한데다, 일제시대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투사도 많아 자부심이 세다. 또 6·25전쟁 때도 유엔군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았던 만큼 상대적으로 부역자 등 경력에「때」를 묻힌 사람이 적었다는 지적이다.
때문에「성분」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북한사회에서 함경도출신은 자연스레 요직에 대거 등용됐고, 자기들끼리 잘 뭉쳐 타 지역 특히 평안도출산의 미움을 많이 샀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중앙당 간부지리 60%와 평양 등 주요 시-도당의 책임비서까지 함경도출신이 맡았을 정도.
심지어 5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황해도의 경우 유엔군의 점령기간이 길어 주민구성이 「복잡」하게 됐다는 이유로 이 단위 선전실장까지도 함경도 출신에게 맡기다 시피 했다.
귀순자들은 이 때문에 평양출신의 김일성이「함경도자존심」을 키운 장본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50년대는「함경도사단」이 정권을 주름잡았던 관계로 인사 등에 있어 지역주의의 병폐가 심했다.
이에 김일성은 55년 함남도당 확대전원회의를 열고 가족·종파·지역 등 지방주의의 문제를 공식 제기하고 본격적인 수습에 나섰다.
그럼에도「함경도 세도」는 꺼지지 않았고 급기야 평안도·황해도 등 출신들이「함경도 짜드리개」와 결혼까지 꺼리는 경향까지 나타나는 등 지방색은 날로 곪아 갔다고 한다. 60년대에는 인사에서의 탕평책으로 지방색을 뿌리뽑으려 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벽에 부닥쳤고, 73년9월 당 비서에 선출된 김정일이「환부」에 메스를 대면서 겨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는 게 귀순자들의 얘기.
당시 당 중앙의 검열그룹을 이끌고 전국을 초도 순시한 김정일은「함경도가 구호만 번듯하게 내건 채 일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질책을 했다고 한다.
김은 그 원인이「함경도 제일주의」에 있다고 보고 중앙에서의 과감한 사상투쟁과 인사정책을 전개, 함경도 출신에게「혼쭐」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김일성이 지방주의 타파를 내건 지 근 20년만에 아들이 함경도 위세를 잠재운 셈.
그러나 집을 맘대로 옮길 수 없는 데다 통신이 제한된 북한 사회에서 함경도를 둘러싼 지방색의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고 또 이 지역 기성세대들이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는 평안도·평양출신의 득세가 두드러지면서「절름발이라도 평양남자」,「000촌놈」 등의 은어까지 생겨났다.
전 북한 외교관 고영환 씨(40)는『68년의 푸에불로호 사건, 76년의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 등을 계기로 출신성분이 나쁜 평양사람들은 모두 자강도 등의 산간오지로 내보냈다』며 『이후 평양의 신세대들은 노동당 입당이나 대학입시에서 계속 우대를 받아 오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일성의 집안과 관계되는 평양의 김·강씨(모계), 그리고 토박이 강씨 등은 당 중앙의 핵심부에도 상당히 진출해 있는 상태다.
한편 현재 북한 권력서열 22위까지의 인물별 출산지역을 보면 함경도가 13명(함북 12명, 함남 1명)으로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은 평남 3명, 평양 2명, 양강도·강원도 각1명, 불명 2명으로 집계됐다. <통일부=김국후 차장·유영구·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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