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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듯 입술에 착 붙는 유리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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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31면

매일 아침 한 잔의 물을 마신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찬물은 잠결의 몽롱함을 손끝의 감촉과 눈으로 일깨운다. 하루의 출발이 신선해야 일이 잘 풀린다. 신선함으로 스스로를 접대해야 한다. 별것 아닌 유리잔 하나에도 신경 써야 할 이유는 넘치고 넘친다.
나만의 아침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선 ‘예나 글라스(Jenaer Glas)’가 제격이다. 투명한 재질감과 감촉, 심플한 디자인의 유리잔은 언제 보아도 매력적이다.
유리잔의 굵기는 손아귀에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입술에 닿는 부위는 키스의 쾌감을 높이는 입술처럼 얇지도 두껍지도 않다.
사용하다 보면 쉽게 깨지는 게 유리잔이다. 튼튼한 물컵이 많은데 왜 ‘예나’만을 고집하느냐는 마누라의 핀잔도 아무렇지 않다. 물의 투명함을 오감으로 느끼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없다는 확신의 반발이다.
‘예나 글라스’는 독일 예나에서 1887년 화학자 오토 쇼트(Otto Schott)가 창업한 유리용기 전문회사다.
예나는 오래전부터 질 좋은 유리의 생산지다. 세계 최고라 불리는 ‘자이스 이콘’과 ‘칼 자이스’ 같은 독일의 명렌즈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예나 글라스’의 우수함은 무엇일까. 좋은 유리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는 점이다. 실험실의 비커처럼 화학적 안정성과 불에 닿아도 깨지지 않는 내열성이 돋보인다.
표면은 매끄럽고 굴곡도 적다. 동사 특유의 브로실리케이트 강화유리 덕이다. 100년 이상의 세월은 ‘예나 글라스’의 품질을 검증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내가 ‘예나 글라스’를 좋아하는 진정한 이유는 디자인의 매력 때문이다. 많은 제품이 생산되지만 일관된 공통점은 장식을 배제한 단순함이다. ‘예나 글라스’의 디자인 미학은 바로 바우하우스(Bauhaus)의 전통에서 출발한다. 1920년대 독일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했던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의 영향으로 편리와 기능의 단순화란 지점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단순한 유리잔에 담긴 비례와 균형의 절묘함을 즐기는 일은 나의 몫이다. 다소 얇아 보이는 균일한 두께의 유리잔은 직경과 높이, 밑쪽으로 줄어드는 체감률의 조화가 일품이다. 단순하게 보일수록 형태의 조화를 갖추기 어렵다. 군더더기를 빼낸 형태소만의 배치는 이론이 아닌 감각의 영역에서 완결되는 까닭이다.
감각의 완성은 무위의 시도를 반복해야만 얻어진다. 모든 예술품은 인간의 예지와 시간의 응축을 원죄처럼 받아들여 만든 결과다.
‘예나 글라스’를 사용하는 커피숍과 레스토랑이 가끔 눈에 띈다. 새삼 주인의 안목을 다시 보게 된다. 이런 업소는 인테리어 디자인 역시 수준급인 경우가 많다. 작은 것을 흘려버리지 않는 섬세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무릇 모든 깊이는 보이지 않는 부분의 완결이 쌓일 때 드러난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예나 글라스(Jenaer G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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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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