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는 여백의 매력 박진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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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10면

“스트레스, 그런 거 없어요. 몸이 좀 힘들긴 해도 촬영장 분위기가 너무 좋거든요. 드라마가 잘나가는데 스트레스 받을 게 뭐 있어요.”
SBS-TV 화제작 ‘쩐의 전쟁’(장태유 연출, 이향희 극본) 얘기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다 돈의 노예가 돼 가는 금나라(박신양 분)를 중심으로 사채업자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 드라마는 최종 2회를 남기고 시청률 35%를 넘나든다. 박진희는 금나라를 지켜보다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전직 은행원 서주희 역을 맡고 있다.

종일 비가 오락가락한 날이었다. 청담동 미용실에서 만난 박진희는 첫 만남부터 유난스레 웃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쉬는 날, 꽃꽂이를 배우고 오는 길이랬다.
“배우란 게 온 감성을 짜내며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내 정서가 메마르는 것 같아 3주 전부터 매주 하루 비워서 배워요.”
스트레스는 없다 해도 속상하진 않을까. 박신양의 처절한 연기가 초반부터 화제더니 드라마는 이제 ‘원맨쇼’란 평까지 돈다.
“에이, 신양 오빠가 지금껏 잘 끌고 와서 드라마가 잘되고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작품만 잘되면요, 전 얼마든지 가려지는 역, 할 수 있어요.”
기대보다 역할이 작고 출연 분량이 적지 않으냐고 재차 질문해도, 그는 캐릭터에 대한 자긍심으로 노련하게 피해 갔다.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그 역할을 어떻게 해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양심적인 인물이잖아요. 사람들이 다 돈에 휘둘리는 것 같아도요, 현실에도 이런 사람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있단 말이에요!”
평범하다. 나긋나긋한 여배우가 아니라 씩씩한 옆집 누이 같다. 뛰어난 미모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도 갖추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나 싶다.

데뷔한 지 만 10년. 이렇다 할 대표작이랄 게 없다가 전환점을 맞은 게 지난해다. SBS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20대와 40대를 오가는 능청스러운 연기가 주목을 끈 것.
“하나하나 조금씩 성장해 왔다고 생각해요. 매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스무 살 때 지하 1층만 보였다면 서른이 된 지금엔 그때보다 더 깊은 게 보여요. 배우란 게 이렇게 자꾸 더 깊이, 지하로 내려가는 직업 같네요.”
배우가 직업이란 건 그에게 현실이다. 직업인답게 그는 ‘직장’과 거리를 둔다. 알려졌다시피 최정윤 등 몇몇을 제외하고 연예계 친구가 별로 없다. 협찬받는 것 외에 옷·액세서리 등에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 월급은 받는 대로 부모님께 드리고 용돈으로 생활한다. 스스로 자평하길 “톱(top)에 올라본 적 없어서” 화려한 스타덤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트렌드에 민감하고 세간의 인기에 목매는 연예계란 게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단다.
“연예인이니까 공인의식은 있어야겠지만, 제게 중요한 건 나를 옭아매지 않는 일이에요. 전 촬영하다가도 시간이 나면 근처 쇼핑몰 구경 다녀요. 선글라스나 모자 같은 것도 안 쓰고…. 제가 좀 무난해요.”
다른 연예인들을 보면 때로 신기하단다. 3차원·4차원의 독특한 세계가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런 면이 없다고. 그래서 예능프로 출연을 꺼린다.
“일단 개인기가 없고요. ‘야심만만’에 세 번 나갔는데 제 인생의 스펙터클한 경험은 죄다 말했어요. 다른 사람들 보면 어떻게 저런 시트콤 같은 일이 많았나 싶고…. 뭐, 작가가 써주겠다며 더 나와달라고는 하는데, 그런 건 싫더라고요.”

직업이기에 끝을 가늠해보기도 한다.
“앞으로 5년은 연기할 거예요. 근데 연기를 빼고 인간 박진희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게 때론 두려워요. 그래서 요새 대학원(연세대 사회복지) 다녀요. 연기 그만두면 보육원 하려고요.”
요즘 그녀는 차기작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귀 따갑게 듣는다. ‘이제 탄력 받았다’는 게 주변의 시선이다. 스스로 “일이 잘돼서 좋은 건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라고 고백했듯, 영화 쪽으로도 분주하다. 남북문제를 다룬 ‘만남의 광장’(8월 15일)과 궁중 미스터리물 ‘궁녀’(10월)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잘된 것보다 망한 게 많았지만요, 저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반박하고 싶었어요. 그게 내 마지막 작품이냐고요. 앞으로 보여줄 거 많아요. 인생관이 ‘현재에 충실하자’거든요.”
해보고 싶은 건 치열하고 처절한 역할, 이를테면 작부 같은 것. 정말 이해할 수 없이 굉장한 악역도 맡아보고 싶단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에서 그런 역할들이 어렵잖게 상상된다. 평범한 외모가 주는 힘이다.
우리 나이 서른. 잘만 되면, 전도연 같은 여배우를 또 한 명 갖게 될지 모를 일이다. 안 되면, 목소리 쩌렁쩌렁한 보육교사를 갖고 말겠지만.

인생관 ‘전화위복’ 애정관 ‘무한도전'

최근 출연분 촬영을 마친 영화 ‘궁녀’는 박진희의 연기 10년을 가늠해볼 작품이 될 것이다. 궁중 미스터리물을 표방하는 ‘궁녀’는 그녀의 영화 데뷔작 ‘여고괴담’(1998)을 떠올리게 한다. 냉소적이며 이기적인 우등생 소영을 똑부러지게 연기, 대중의 머릿속에 이름 석 자를 새겼다. 연예계 데뷔는 1997년 KBS 드라마 ‘스타트’. 영화 ‘산책’(2000)으로 제23회 황금촬영상 신인상을 받았고, ‘하면 된다’(2000), ‘연애술사’(2005) 등에 출연했으나 충무로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전환점이 된 게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2006). 내숭형 스튜어디스와 막가파 아줌마를 오가는 역할을 너끈히 소화, 시청률과 연기 양쪽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해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최고인기상을 받았다. ‘쩐의 전쟁’ 대사를 빌려 생각나는 사자성어를 2개 말해보라고 했더니 ‘전화위복’과 ‘무한도전’을 댔다. 드라마에 따르면 전자는 그 사람의 인생관, 후자는 애정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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