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이가 찾아오다-서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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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무대>아파트 거실

<등장인물>
남자-20대 초반의 암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다.
여자-20대 중반의 여자 머리가 길다.
여자, 아파트의 현관문 앞에서 의심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남자, 문밖에서 초조하게 서있다.
남자:잠시면 됩니다. 잠시면 곧 돌아가겠습니다.
여자:누구세요.
남자:저어….
여자:(문을 닫으려고 한다.)
남자:가스 검침을 나왔습니다.
여자:정말, 가스 검침을 나오셨나요?
남자:(주저주저하며)예.
여자:들어 오세요. (문을 열어준다) 가스 계량기는 저쪽 다용도실에 있어요.
남자: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었습니다.
여자:가스 검침을 나온 사람이 아닌가요? (여자, 머뭇거리며 문쪽으로 다가간다. 자칫하면 문을 열고 도망갈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자: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여자:어서, 나가 주세요. 아니면 경비를 부를 테예요.
남자: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남자, 여자를 저지한다)
여자:제발, 집에 있는 아무거나 가지고 빨리 나가주세요. 신고는 하지 않을테니 어서 나가세요.
남자:저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여자: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남자:저는 당신 아파트 맞은편에 사는 사람입니다.
여자:그걸 어떻게 믿어요!
남자: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가 알고 있는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리면 믿겠습니까.
여자: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난, 당신같은 사람을 알지 못하니까 어서 나가 주세요.
남자:(이야기를 쏟아 붓듯)당신은 혼자 삽니다. 가끔씩 낯선 자동차가 당신 아파트 앞에 서있곤 합니다. 그 차는 하얀색 볼보입니다. 당신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그 차를 타곤 했습니다. 당신은 일주일에 세번 슈퍼를 갑니다. 어제도 아파트 쇼핑센터에서 장을 보았습니다. 슈퍼에서 샐러리 2단, 양배추, 당근, 옥수수 통조림, 1.5 리터 우유 한팩을 샀습니다. 그리고 생리대도 샀습니다. 늘 쓰던 생리대와는 다른 요즘 새로 나온 신제품을 골랐습니다. (여자,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는다. 유리컵을 들었다)
여자:그만, 당신이 뭔데 그런 것까지 아는 거예요.
남자:제가 알고 있는 당신의 일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여자:가까이 오지마. 어서 나가. 안 나가면 경비에게 신고를 하겠어.
남자:유리컵을 휘두르면 깨질 염려가 있습니다. 다칠테니까 조심하십시오.
여자:(남자에게 유리컵을 휘두르며)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나가.
남자:위험합니다. (여자에게서 유리컵을 빼앗으려 한다. 그녀는 놀라서 유리컵을 떨어뜨리고 만다. 남자는 그 때 손을 베인다)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실례가 안된다면 약솜 좀 주시겠습니까. 곧 피가 멎을 것 같군요.
여자:(놀라서)그런 것 없어요. 대체, 당신은 누구세요. 혹시, 그이가 보낸 사람인가요?
남자: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알기 위해 아파트를 방문한 것입니다. 제 의지로 왔을 뿐, 누가 가라고 권한 적은 없습니다.
여자: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어서 빨리 나가 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을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남자:10분, 10분만 여기 있으면 안될까요!
여자:10분이고 1분이고 모르는 사람하고는 같이 있기가 무서워요.
남자:저는 당신을 잘 알지 않습니까.
여자: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요.
남자:제가 당신을 알게된 것은 4개월 전입니다.
여자:어디서, 당신을 만난 적이 있나요. 난생 처음 본 사람 같은데.
남자:당신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자:그럼, 대체 나를 어떻게 알게 됐나요.
남자:저는 그때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때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을 알게된 것입니다.
여자:(비웃듯이) 아, 그럼 당신이 나에게 첫 눈에 반하신건가요?
남자:아닙니다. 그때 당신의 긴 머리카락이 무료했던 나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부른 것이 될 것입니다.
여자:저는 당신을 절대로 부른 적이 없어요.
남자: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카락이 나를 불렀습니다.
여자:그럼, 당신이 혹시 새벽 2시에 전화를 걸었다가 아무말도 없이 전화를 끊는 사람인가요.
남자:당신의 모습이나 손짓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자:대체 원하는게 뭐죠.
남자:아직, 당신을 확실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여자:이봐요. 난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많아요. 나를 확실히 알고 싶다니, 불공평하지 않아요?
남자:저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당신의 아파트 맞은 편에 살고 있고 당신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4개월 전에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움직이기가 불편해서 하릴없이 집에서 창밖 만을 내다보고 있을 때 당신의 머리카락이 나를 부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자:아, 그 머리카락 이야기는 그만해요. 그런 것 말고 다른 것 말이에요. 내가 한번 맞혀볼까. 당신나이는 스물 두살 정도 돼 보이는군요. 그리고 대학생이죠.
남자:나이는 스물 한살입니다.
여자:난, 당신보다 나이도 많아요. 대학생도 아니고요.
남자:그럴꺼라 생각했습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여자:대학에서 무얼 공부하세요?
남자:천문학을 하였습니다.
여자:커다란 망원경으로 별을 보는 거 말이죠.
남자:요즘은 하늘이 맑지 못해서 별을 보기가 힘듭니다.
여자: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망원경으로 무얼 보죠?
남자:당신의 방을 봅니다. 그리고 방에 있는 당신을 봅니다.
어자:정말, 짓궂군요.
남자:요즘은 당신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파트의 유리창이 너무나 더러워졌더군요.
여자:전, 그렇게 살아요. 그건 모르셨죠. 이 집 어디에도 정을 주고 살지 않아요. 어차피,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니까요.
남자: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니었습니까 ?
여자: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 집이 될지도 몰라요.,
남자:계속 여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자:이 집이 내 것이 되더라도 나는 이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싶어요.
남자:당신이 이곳을 떠난다면 섭섭해질 겁니다.
여자:섭섭해진다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남자:농담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눈물이 글썽해진다)
여자:이봐요. 정말, 우는 거예요?
남자:….
사이
여자:정말, 이상하신 사람이군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남자:죄송합니다.
여자:죄송하긴요. (여자,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저어, 술 한잔 하실래요?
남자:전, 술을 못합니다.
여자:어쩌나, 저희집엔 술밖에 없어요.
남자:전, 수도물을 마실테니까 당신은 술을 드십시오.
여자:끓이지 않은 수돗물은 해로워요.
남자:아무 것이나 괜찮습니다.
여자:저 혼자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시겠어요. 저도 같이 수도물을 마시지요.
남자:아닙니다. 당신은 수도물을 마시면 안됩니다.
여자:그건, 왜죠?
남자:수도물은 몸에 해롭습니다.
여자:술은 몸에 좋나요?
남자:그러나 술은 증류가 되어서 나온 깨끗한 알콜입니다. 저 때문에 더러운 물을 마시지 마십시오.
여자:그럼, 좋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 거실 안쪽 주방으로 간다.
남자. 여자가 나가는 쪽을 계속 쳐다본다.
여자, 술과 물을 가지고 나온다.
여자:드세요.(남자에게 수도물이 든 잔을 권한다)
남자:잘 마시겠습니다.
여자:그런말 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상한 말투를 쓰세요. 그거 아세요?
남자:전, 이상한 말을 하지 않는데요.
여자:꼬박꼬박 존대말을 쓰시잖아요. 날 아는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저한테 존대말을 쓰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의 존대말은 어색하게 들려요.
남자: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어떻게 말을 합니까.
여자:존대말은 안쓰죠. 심지어는 가끔씩 나한테 욕도 하죠. 아, 그런 것들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남자:당신 같은 분한테 어떻게 욕을 할 수가 있습니까. 화가 나는군요.
여자:(남자의 볼을 만지며)화내지 마세요. 난, 누가 화내는 것이 싫어요. 남자들이 화를 내게 되면 언제나 일이 좋아지지 않죠.
남자:당신이 싫다면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여자:얼굴이 빨개지셨군요.
남자:….
여자:(교태해진 목소리로)당신은 물만 마시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왜 당신 얼굴이 빨개졌을까요?

<12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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