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정치생활 마감… 미련도 컸다”/김대중씨가 밝힌 최근심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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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자신했던 대선승리… 아내도 평생 첫 눈물/언론 「거목」칭송 국민사표 되라는 충고로
지난해 12월19일 정계은퇴선언후 칩거생활을 해온 김대중 전 민주당대표가 이달 하순 출국계획을 확정짓고 5일부터 당내외 각계인사들과 식사모임을 갖는 등 주변정리에 나섰다.
김 전 대표는 5일 대선 당시 자신을 취재했던 민주당 출입기자단 1백여명을 부부동반으로 63빌딩에 초청,만찬을 함께하면서 은퇴결심 당시와 그간의 심정,앞날의 설계 등을 20여분간 설명했다.
다음은 그가 밝힌 심경 요지.
『오늘 여러분들을 부부로 초청하게된 것은 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초청장을 받았다. 몇개월정도 초청교수 자격으로 통일문제 등을 연구할까 한다. 지난해 12월19일 새벽 대선실패가 확정됐을때 평생 울지 않던 집사람(이희호여사)이 눈물을 흘렸다.그래서 내가 「80년 사형언도를 받을 때를 생각하면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니오」라고 위로해 주었다.
솔직히 말해 지난 대선에서 꼭 당선될줄 알았다.
은퇴 성명서를 만들때(내가 구술하고 집사람이 적음)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가능한 짧게 썼다.
그러나 성명서를 쓰면서도 파란만장했던 40년 정치생활을 마감하려하니 차마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나도 인간인데 40년 걸어온 험난한 외길에 종언을 고하려는 것에 왜 미련이 남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정계의 여러 선배들이 물러설 때 물러서지 못해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보아오면서 물러날 때를 선택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물러서는 시기의 선택도 일종의 위기관리능력이라고 본다. 크고 작은 결단을 내려야 할때 그렇게 하지 못한다거나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된다. 정계은퇴를 하면 사생활은 차라리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선때는 그렇지 않던 언론들이 막상 물러나니 나를 「거목」이니,「민족의 스승」이니 하고 평가해줬다. 좀 거룩하게 된 것 같아 즐겁기도 했지만 국민의 사표가 되라는 충고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내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서운하다고 느끼는 것중 하나가 언론인들을 자주 못만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언론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당을 출입하는 기자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나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호감을 갖거나 이해하게 되고 출입처가 바뀌면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점에서는 부족한 나로서 무척 행복하게 생각한다.
은퇴성명서에서 밝혔듯 나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겠다. 내가 이런 일관된 신념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절대적 협력 덕분이다.
내가 다섯번의 죽을 고비,6년의 감옥생활,10년간의 연금과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내형제나 가족은 물론 나와 가까웠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빼앗기고 당국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상처하고 두 아들까지 둔 나에게 처녀의 몸으로 결혼해준 내 집사람의 헌신적 노력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다. 배다른 내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친아들 이상으로 사랑해주었다.
나는 지역감정의 피해도 받았고 용공분자라는 모함도 받았다. 그러나 정계은퇴를 계기로 오해도 풀리니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해방후 내가 살아온 역사를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학문적 배경과 사관을 갖고 써볼까 한다.』<박병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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