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회귀10년] 정체성 혼란 딛고 '일국양제' 실험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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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은 바나나였다.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 그 이중성이 홍콩인을 규정하는 개념이었다. 100년 넘게 홍콩을 통치해 온 영국은 홍콩인에게 문명이라는 이름에 가까웠다. 서양의 개인주의, 업무의 효율성, 자본주의의 잽싼 이윤 추구를 홍콩인은 그 문명 속에서 오래 숙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효율로 재는 ‘홍콩 익스프레스’의 현상을 낳았다. 이제 그곳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들어선 중국이 있다.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다. 7월 1일이 그 10주년이다. 달라진 홍콩의 모습에 주목하면서 홍콩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짚어본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

많은 홍콩 사람들은 이 시절을 ‘발전의 시대’로 회상한다. 극도의 효율을 중시하는 홍콩 익스프레스는 이 시기 조용한 태동의 세월을 보냈다. 홍콩이 전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70년대 ‘산업화 시대’를 이끈 주역은 71년 홍콩 총독으로 부임한 머레이 맥리호스였다. 그는 동시대 국가 발전을 이끈 한국의 박정희,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비슷했다.
 경제에 관한 그의 정책은 ‘적극적인 불간섭’으로 정리된다. 규제를 가능한 한 풀었던 게 그의 주요 경제정책이다. 한편으로 그는 홍콩을 비효율의 늪에 허덕이게 했던 관료 부패를 잡기 위해 염정공서(廉政公署)를 만들었고, 공공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했다. 공공 의료 개념을 도입하고 9년 연한의 의무 교육제도, 소비자 보호를 위한 기구 설립, 대규모 공원 건설 등을 추진했다. 이들은 그가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일궈냈던 향후 홍콩 번영의 초석이었다. 영국이 보낸 총독의 휘황찬란한 정치적 업적에도 이 시대는 리샤오룽(李小龍)으로 대표되는 중국적인 특성의 스타가 스크린을 지배한다. ‘정무문(精武門ㆍ72년)’과 ‘맹룡과강(猛龍過江ㆍ72년)’ 등 리샤오룽의 액션 영화를 보면서 홍콩인들은 서양의 통치와 무게에 짓눌린 심사를 적절하게 달랬다.

1980년대 국제금융 강자

 봉제와 인형, 신발과 전자부품이 수출을 주도했던 70년대에 비해 이 시기는 홍콩이 국제 금융의 떠오르는 강자로 자리 잡은 때다. 중국이 78년 개혁ㆍ개방을 선언한 뒤 홍콩의 경제는 구조적인 변환을 겪는다. 홍콩 북부 지역에 빼곡히 들어섰던 공장들은 인건비와 토지 임대료가 훨씬 싼 중국으로 이동한다. 제조업의 공동화 위기 의식이 완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대신 금융업으로의 진출이 뒤를 이었다. 따라서 홍콩 사회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은 이 시기에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영국과의 ‘연합 성명’에 의거해 ‘기본법’을 만든다. 향후 50년 동안 자본주의와 중국 사회주의가 공존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허용하고 홍콩은 특구로서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다른 부문의 자치권을 향유한다는 내용이다. 헛갈리는 정체성, 대륙으로 회귀하기 위한 동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불안감 등이 짙어지면서 영화에서는 폭력의 미학을 앞세운 누아르가 넘쳐났다. 저우룬파(周潤發)의 ‘영웅본색(英雄本色)’을 비롯해 ‘첩혈쌍웅’ 등 요란한 총성과 마약, 복수극이 판치는 영화가 홍콩인의 심성을 강하게 파고 들었다.
 

1990년대 홍콩 탈출 러시

 캐나다 벤쿠버와 토론토는 홍콩인들로 넘쳐났다. 홍콩을 빠져나가기 위한 부유 계층의 최신판 엑소더스였다. 벤쿠버 등은 아직도 홍콩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다. 그때 넘어간 사람들이다. 호주의 시드니와 멜버른 등도 홍콩을 탈출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회귀 뒤의 홍콩이 맞이하게 될 중국 체제의 생경함이다. 당시 홍콩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주제는 홍콩의 민주화였다. 국제적으로 몰렸던 중국을 향해 영국은 정치적 공세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국은 국제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정치개혁에 착수해 시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대폭 확대한 공안(公案)조례와 사단(社團)조례를 제정했다.
 양국 간의 반목과 대립은 마지막 총독 크리스토퍼 패튼이 부임한 지 3개월 만인 1992년 10월 시정연설에서 민주화 정치개혁 방안을 발표하자 절정으로 치달았다.
 패튼 전 총독은 최근 “사실 영국은 홍콩에서 민주화 절차를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시인하며 “홍콩 총독 부임 당시 풀어야 할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공동선언 발효 전에 홍콩의 시민권을 신장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느냐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21세기 홍콩 기업하기 좋은 도시

중국의 힘이 크게 뻗쳤다. 1997년 회귀 뒤 홍콩은 부침을 겪었다. 홍콩을 떠받쳤던 강한 활력은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된 뒤 끊겼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지난 10년의 총체적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우선 90년대 홍콩을 떠났던 이민자들의 상당수가 돌아왔다. 최근 들어서는 홍콩의 경기가 높은 성장을 지속적으로 구가하면서 “홍콩이 예전의 활력을 완전히 되찾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후 97년 중반 1만6600선이던 홍콩의 항셍(恒生) 지수가 98년 말 6660선으로 급속히 떨어지고 생활고에 시달린 가정의 이혼과 자살 등 사회 풍파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홍콩 경제는 3년 동안 평균 7.6%에 달하는 고성장을 일궈냈다.
 경제 환경에 관한 세계 유수 평가 기관의 점수는 후하기만 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06년 비즈니스 환경에서 홍콩이 1위라고 평가했다. 금융인력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3위 수준이다. 그러나 반대의 소리도 만만찮다. 일부 전문가들은 “예전의 활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해외의 눈길을 의식한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활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평을 내놓고 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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