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남긴 「기업의 정치외도」(14대대선 재분석: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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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현대조직 선거동원해 경영인재 “훼손”/함장이 함대 오도… 대기업 편견도 문제
정치와 기업은 같은 판에서 같은 길을 갈 수 있는가,아니면 엄격하게 서로 다르게 「자리매김」해야 되는가.
대선결과 국민당의 패배는 지난 4월 총선이후 1년가까이 정치와 경제를 함께 들었다놓은 소위 「재벌의 정치참여」에 하나의 결론을 가져다주었다. 선거는 끝났지만 「기업은 기업의 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국민이 짚어준 것이다.
지난 1년은 돌이켜보면 특히 현대와 일시적이긴 했지만 대우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선거와 기업이 함께 얽혀들어가 국민은 물론 경제인들에게도 「이 무슨 국가적 낭비인가」를 수시로 자문케한 한해였다. 기업을 함대에 비유하면 함대의 방향타는 함장이 쥐고 있다. 함장의 판단에 전함대원의 사활이 달려있다. 방향타를 제대로 잡았다면 몰라도 잘못됐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다. 함대가 잘못된 길로 간 것은 함장 잘못이지 함대탓이 아니다. 이 점에서 정주영씨의 정치참여는 현대그룹뿐 아니라 전체 경제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결과가 됐다.
「기업은 사람이다」는 말을 구태여 떠올리지 않아도 우선 현대그룹이 이번 대선에서 본 가장 큰 피해는 유능한 인재의 손실이다. 해외도피했다가 최근 귀국과 동시에 입건된 이현태 현대석유화학 사장을 비롯,구속중인 음용기현대목재사장,그리고 최수일중공업사장과 안충승부사장,김형벽중장비사장,어충조종합기획실장,이병규대표특보 등 현재 현대그룹에서 구속,수배중이거나 소환대상인 핵심임원들만도 20여명을 넘고 있다. 정훈목 현대건설회장은 아예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들 대부분이 20∼30년간 현대에서 잔뼈가 굵어온 전문경영인들로 남다른 투혼과 애사심이라는 특유의 현대맨 기질로 기업에 봉사해 왔다. 또 이미 정치의 길로 깊숙이 들어섰지만 정몽준의원 등을 포함해 상당수는 해외에서 수학,일찍부터 경영수업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현대의 선거지원은 결국 이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말았다. 기업의 소유경영자가 그룹경영의 전권을 쥐다시피한 우리의 기업풍토아래서 그들로서는 사주의 지시를 뿌리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업이 본연의 자세·영역을 벗어나 정치로 뛰어듦으로써 유능한 인재들을 훼손시켰고 수난을 계속 겪게 만들었다.
현대그룹은 지난 대선에 4백여명의 인력을 국민당에 파견했었고 선거후 조치로 대부분은 다시 회사로 복귀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엘리트중의 엘리트라는 이들의 부재중에 생긴 공백이 복귀한다해서 즉각 메워지거나 곧바로 일손이 잡히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들뜬 정치바람이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로선 애초에 선거참여에 회의적이었던 임직원들도 적지 않아 이들이 경영층에 느끼는 괴리감도 쉽게 풀리기 어려운 고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우중회장의 몇차례 대통령선거 출마의사번복으로 그때마다 술렁거렸던 대우그룹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망정 사정은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전경련 등 재계가 기회있을 때마다 정국의 안정을 주장해온 뜻은 바로 기업이 정치상황에 신경쓰지 않고 기업경영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며 그러나 『오너 스스로가 정치참여로 기업을 흔들어 버린 결과앞에서는 이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게 된 입장』이라고 털어놓았다. 합리와 능률을 가장 기본으로 하는게 기업조직이다. 그 기업조직에서 「비합리」와 「비능률」을 강요해놓고 이제는 밖으로 면목을 내세우기 어렵게 됐다는 이야기다. 충격의 정도야 다르겠지만 현대·대우 모두 흐트러졌던 분위기를 추스려 기업마인드를 다시 정상화하는데는 앞으로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현대의 선거지원은 현대자체의 문제만으로 끝난게 아님은 물론이다. 직접적으로는 현대의 많은 하청기업들이 선거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경영공백이 적지 않았다. 여타 기업들도 여느 선거때보다 훨씬 심했던 재계와 정치권의 갈등으로 경영이완,생산차질이 빚어져 그 결과는 그나마 완만한 증가세를 보여오던 수출의 11월에 이어 두달연속 감소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현대의 정치외도」로 이번 선거를 통해 심각해진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시각이다. 그동안 말만 요란했던 대대기업정책을 시행에 옮기고 재계와 정치권의 관계도 어떤 형태로든 달라져야 한다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신정부도 이에 따라 재벌의 정치참여라는 고리를 끊는다는 차원뿐 아니라 이같은 국민들의 비판여론을 업고 강도높은 대기업규제정책을 시행에 옮길 태세다. 재계는 이에 반해 훨씬 좁아진 입지에서 의사소통의 채널마저 잃어 정계와 재계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불편한 양상을 빚어내고 있다.
분배와 형평의 해결이 주요 과제가 되어 있는 우리사회에서 소위 「재벌」로 표현되는 경제력집중이 낳는 부정적 폐해는 그동안 수없이 지적돼왔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대기업이 한 면에 의한 일방적 매도대상으로 진단돼서는 곤란하다.
국제화·개방화로 세계는 지금도 빠른 변모를 보이며 그 추세는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더 가파라지고 있다. 여기에 기업의 역할도 갈수록 달라져 국·내외시장에서 다국적 거대기업과의 피나는 경쟁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설 자리가 없으며 한국경제의 활로 또한 어려운 상황이다.
한 시대의 청산과 정치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선거가 지녔던 의미가 더없이 컸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의 사정을 기다려줄리 없는 세계경제환경변화를 걱정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현대의 정치참여는 한편으로 보면 과거 30여년간의 권위주의 아래 정경유착의 「득」을 누려온 일부 재벌이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빚어지는 자체내부의 취약성을 정치권력에의 진출로 보완해보려 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이번 선거의 결과는 이러한 과거의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과 정치권력의 사이가 서로의 친소에 따라 「유착」과 「갈등」을 반복하던 시대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하려면 국민과 정부,그리고 기업들도 국내뿐 아니라 세계전체에 잣대를 두고 서로를 향한 시각을 재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대대기업 정책도 이런 면에서 일방적 규제보다 국제경쟁력의 강화에 초점을 두어 산업의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대기업들도 이에 앞서 단순한 외형적 기업확장이 아니라 이제는 털 것은 털어가면서 세계시장의 경쟁력있는 기업으로서의 변모노력이 요구되는 점도 이런 이유에서다.
「문민정치」의 시대가 이번 선거로 30년만에 다시 열렸다면 14대 대선이 기업과 정치사이에 남긴 중요한 의미는 지난 30년의 과거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계기를 열어주었다는 점이다.<장성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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