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대표의 국민당」재확인/경주의총 “새출발”결의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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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갈데 없는 의원들 「당무복귀」간청/「기금」운영방식·현대 단절 등이 숙제
23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린 국민당 의원총회는 정주영대표의 건재를 확인해준 자리였다. 이 자리는 또 「대선후 공중분해설」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고 국민당의 재출발을 알린 모임이기도 했다.
이날 의총은 또 정 대표의 전면복귀를 알리는 의식과도 같았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정 대표에게 대선패배를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하면서 조속한 당무복귀와 지휘통솔을 간청했다. 물론 정 대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선패배에 따른 상당한 분쟁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습들이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나아가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말해주는듯 하다. 이념이나 명분보다 돈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정치판의 한계이기도 하다. 당이 공중분해 될 경우 그동안의 처신으로 오갈데 없게된 다수의원들의 자구책이 「돈」과 자연스레 연결된 셈이다.
정 대표 역시 이같은 생리를 잘 알기에 자신의 전면재등장을 「아래로부터의 간청」이라는 바람직한(?) 모양으로 연출한 것이다.
결국 이날 의총은 「국민당은 여전히 정주영대표의 당」이라는 한계를 동시에 인정한 자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다소 이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됐던 이종찬의원마저 정 대표와의 독대자리에서 「동참」을,나아가 의총에서는 다른 의원들과 함께 「분골쇄신」을 각각 약속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정 대표의 보상은 당발전기금 2천억원 출연약속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같은 한계를 인정한 가운데 국민당이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보일 것인가라는 문제다. 정주영대표의 당이라는 한계와 「현대당」이라는 한계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아니면 그야말로 「국민의 당」으로서 어엿한 야당구실을 제대로 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정 대표와 소속의원들은 국민의 당,새로운 야당으로의 재탄생을 다짐했다. 예정에 없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채택,『반대만 일삼아 오던 구습을 청산하는데 솔선하고,당의 체질을 개선·강화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정당으로 발전·성장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정 대표는 「돈의 정치」라는 구습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당화 방안으로 아이로니컬 하게도 「자신의 돈」을 기금으로 약속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바람직한 발전을 가로막는 문제는 남아있다. 일단 정 대표가 기금을 내놓은 이후 누가 그 돈을 관리하느냐 라는 점이다. 공당이라지만 이날 모임이 반증했듯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당운영의 주도권을 쥘 수 밖에 없다. 당분간 정 대표가 당을 이끈다는 것은 스스로 기금을 관리한다는 얘기다. 의원 전원이 이에 동의한 것은 「당분간」불가피하다고 인정한 것이지 「영원히」개인관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 출신들은 대부분 『정 대표가 관리하는 것은 소유권의 행사』라고 당연시한다. 물론 금배지를 단 정치인들은 『기금출연은 공당화 약속의 이행이기에 기금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구체적 사안에 따라 앞으로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으며,이는 심각한 분열의 불씨로 남은셈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현대와의 단절이 어느선까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다. 정 대표는 대선전 『현대와는 18일(투표일) 이후 완전히 단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 이와 관련된 보다 구체적이고 진전된 결정은 보이지 않고있다. 정 대표는 대선 결과에 대해 『옴쭉달싹 못하게 목을 눌러 패배했지만 경제를 위해 승복했다』며 일견 불복의 내심을 피력했다. 나아가 『정책,특히 경제정책면에서 여당을 지원해 경제발전에 일익을 맡겠다』라는 앞으로의 정당활동 방향까지 밝혔다. 넓은 의미에서 「경제발전」을 강조했지만 이미 일부에서는 이같은 방향이 구체적 사안에 적용될때 「재벌」,보다 좁은 의미에서 「현대」를 위한 정치적 압력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구심을 품고있다. 나아가 「여당과의 협조」란 것 역시 앞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준여당이 될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국민당의 이같은 본질적 장애요인에 비해 당체제 개편문제 등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이날 의총후 정 대표는 당분간 현체제 유지를 선언했다. 내부적으로 볼때는 기금의 조성 등 공당화 과정을 일단 지켜보면서 의견조정을 해보자는 갈등유보 상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은 문제는 집권민자당의 흡수력에 일부 의원들이 빨려들어갈 가능성이다. 이번 의총에는 미국에 체류중인 윤항렬·원광호의원 외에 전원이 참석했지만 이미 대선과정에서의 소극적 참여로 「마음이 떠났음」을 시사해온 의원들이 있다. 아직 민자당의 흡수가 표면화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여건만 마련되면 어렵잖게 이적할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는 이미 국민당 소관은 아닌듯하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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