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화의 독자성 재창출|현대한국회화 「선묘와 표현」전을 보고…이경성 (미술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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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호암 갤러리가 1992년도 기획으로 제시한 현대한국회화 「선묘와 표현」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화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기획에 있어서 참신했고 연말 화랑가에 의미 있는 볼거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을 단위로 하는 커미셔너제를 국내 처음으로 도입, 오광수라는 한 사람의 평론가에게 모든 권한을 주어 「선묘와 표현」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것은 평가할만한 일이었다.
운영위원회에서 선정된 오광수 커미셔너는 1992 현대 한국회화전의 주제를 「선묘와 표현」으로 정하고 그에 따라 27명의 작가 55점의 작품을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1년이 넘는 준비 기간과 이 전시의 의의를 살리기 위해 준비된 워크숍 등 여러 과정을 거쳐 마련된 것이 곧 이 전시였던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의 경우 이처럼 한 사람에게, 즉 하나의 시각으로 한국 현대미술을 재단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후진적인 여건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하나의 시각은 진실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많은 눈이 봐야 진정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편견이 국내 비평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혼란된 현실에서 이번처럼 단순 명쾌한 비평의 입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었다.
그 결과 80대에서 20대 연령층에 걸친 작가를 대상으로 한국 회화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작가들을 선택한 오광수 커미셔너의 비평 안목을 높이 사며 다양함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전형을 찾아낸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끌어가려는 리듬, 즉 「선묘와 표현」이라는 주제 아래 한국 회화의 독자성을 재창출하자는 의욕이 엿보였다.
선묘 감각은 충실 공간과 공허 공간 등 이른바 동양적인 미의식으로 이뤄진 것이 많았다.
시각으로 뒤쫓는 선의 느낌도 있었지만 마음으로 느껴 가는 선의 감각도 교차되어 있었다. 더구나 바탕이 되고 있는 흰 공간에 짙은 흑색으로 결정적인 기능을 주는 수도 있었지만 다채로운 색깔로 이뤄지는 수도 있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현대미술의 여건을 감안할 때 오광수 커미셔너가 이뤄놓은 작업이 얼마나 힘겨웠느냐는 것을 같은 미술 평론가로서 공감하는 동시에 용기를 갖고 그 일을 해낸데 대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호암 갤러리가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 기획이 한국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앞으로 이와 같은 참신하고 의욕적인 기획전이 지속되어 혼돈 된 한국 현대회화에 활로를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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