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전씨 대통령 만들기|양 허가"일등 공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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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단독 출마한 전두환 장군을 제1l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에 즈음한 담화문」을 통해『새 역사창조에 신명을 바쳐 일하라는 국가적 소명에 따르는 것이라 보고 사심 없이 주어진 책무를 기필코 완수하겠다』고 말했다.
취임식은 9월1일 거행됐지만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에 따른 보궐선거였던 만큼 전대통령의 임기는 당선이 확정된 8월27일부터 시작됐다.
같은 날 오후 청와대 요직 일부가 개편됐다.
비서실장 김경원·의전수석 김병훈·공보수석 이웅희·경호실장 정동호 등이 새로 임명됐다. 이어 9월3일 우병규 정무1수석·김재(전 경제수석이 비서진에 포함됐고, 9월10일자로 허화평 비서실보좌관·허삼수 사정 수석비서관·이학봉 민정 수석비서관 등이 차례로 들어와 비서실 진용의 골격이 갖추어졌다.
9월3일자로 비서관에 임명된 허문도씨의 경우 정무1수석 휘하의 체제 홍보담당비서관(1급)이었다.
이중에서 「비서실 보좌관」으로만 명시되었던 허화평씨의 위치는 대단히 독특했다.
직급은 차관급으로 다른 수석비서관과 같았다.
그러나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대통령 비서실의 우두머리인 비서실장(장관급)의 보좌관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비서실 전방의 심부름을 해주는 보좌관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다.

<독특한「보좌관」자리>
굳이 당시 정황으로 말하자면 허 보좌관은 사실상「숨은 비서실장」이었다.
6공까지를 통틀어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이 마련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허화평 비서실보좌관은 통칭「보좌관」또는「청와대 보좌관」으로 불렸다. 81년 12월23일자로 그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 명칭은 정계·관계·재계를 통틀어 막강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허 보좌관의 짐무실은 다른 수석비서관들과는 달리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 (1층)에 있었다. 별관(비서동)에서 일하면서 결재를 방을 때마다 본관의 대통령 집무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임금님의 소세작업을 거드는 직책이라 하더라도 최고권력자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일단 한풀 접어주고 대하게 되는게 권력주변의 어쩔 수 없는 생리다.
게다가 허 보좌관은 사실상 5공 정권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 채색작업까지 감독하던 실세중의 실세였다.
증언들을 종합하면 당시 본관 1층 보좌관실은 중요한 사람과 서류들의 1차 집결지였던 듯하다. 전 대통령의 집무실로 향하는 웬만한 문건이나 면담 대상자는 허 보좌관의 손길을 거쳐야 했다. 그만큼 허씨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이 같은 위치였던 허화평씨가 82년 12월 허삼수 사정수석과 함께 청와대를 물러난 뒤 83년 초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것은 5공권력 이면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한 전직비서관은『82년 말의 허화평씨는 이미 모든 정보에서 소외돼 있었다. 한 예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김대중씨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신병치료를 이유로 사실상 미국망명(82년12월23일 도미)을 허용 받게 되는 과정에서도 명색이 정무수석이던 허씨는 철저치 배제당했다. 배제당한 정도가 아니라 그린 큰 일이 논의중이라는 사실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속칭「3허」중에서 허화평·허삼수씨는「대통령 만들기」작업의 일등공신이었다. 허삼수씨는 군법회의를 거쳐 총살형을 당할 각오를 하고 12· 12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 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한남동 공관에서 납치했다. 허화평씨도 이 과정을 전후해 허삼수씨 못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9년 10·26사건 다음날인 10월27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면담했던 한 인사는『면담도중 급한 보고가 있다며 사령관실에 들어온 허화평 비서실장이「사령관님, 정 총장님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5공 정권의 세 대주주가 전두환·노태우·정호용씨이고 이중 전두환씨가 대표이사라면 양 허씨나 이학봉씨 같은 이들은 상무·전무급 실세간부들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최 대통령"중책부탁">
패기만만하고 아직 기득권을 의식하지 않는 위치의 영관급 장교들이「일을 저지르는」방면에서는 아무래도 장군급보다 과감하게 마련이다.
세간에 그랬으려니 하고 알려진 것처럼 과연 전두환 장군은 10·26을 절호의 기회로 처음부터 집권야망을 품고 합수부장의 권력과 하나회 인맥을 무기삼아 대권 가도를 줄달음쳤던 것일까. 이에 대해 집권후의 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대통령으로부터「권력인수」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치 들었던 L씨는 다음과 같이 뉘앙스가 다른 줄거리를 전해 주었다. L씨는 그날 자신이 들은 얘기가 하도 중요한 내용이라 따로 기록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전 대통령이 나에게 두 시간 가량에 걸쳐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80년 여름(어떤 기록으로는 80년7월31일 오전), 최 대통령이 전 장군을 청와대로 불렀답니다. 집무실에 단둘이 마주한 자리에서 최 대통령이「전 장군이 중책을 맡아 주어야겠소」라고 말하더랍니다.
전씨도 그때 국무총리까지는「상상 가능한 범위」에 넣고 있었다는 거지요. 국보위상임위원장으로 사실상 내각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최 대통령이 손으로 자기 소파를 가리키면서「바로 이 자리요」라고 했다지 뭡니까』
전 장군은 그 순간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각하 저는 군밖에 모릅니다』 라고 말하자 최 대통령은『나는 군마저 모르오』 라고 확고한 태도를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발 못 빼게 되어있다">
당황한 상태에서 전 장군은「이제 대한민국이 큰일났구나. 자칫하면 와르르 무너지겠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방금 들은 말이 진짜 최 대통령의 육성인가 싶어 살짝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는 것이다(뒷날 전 대통령이 이 당시의 심정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자 곧 권부 주변에서는「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안 최 대통령의 하야·정권인계 결심을 전해듣고 너무 기뻐한 나머지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는 심정으로 자기들 허벅지를 꼬집었다더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L씨는 전 대통령이 이런 풍문을 전해듣고「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래. 남의 맡을 비비꼬아서 듣기만 하고」 라며 불만을 토로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청와대를 나온 전 장군은 고민하다가 군 선배 한명을 찾아갔었다고 L씨에게 털어놓았다.
이 군 선배는 당시 신군부를 포함해 군부내에서 신망이 있던 K씨(전 국무총리·작고)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L씨의 계속되는 회고.
『전 대통령은 내게 그 군 선배의 이름을 말해 주지는 않았어요. 여하튼 찾아가서 선배님, 이거 큰일났습니다」라며 최 대통령의 하야 결심에 대해 의논했답니다. 그런데 이 선배는 뜻밖에도「이미 그렇게 되도록 돼 있습니다」 라더라는 거예요.
판이 다 자여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전 장군이「제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감당할 자신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니까「그것(대통령직)이 하고 싶다고 하고, 또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자리인줄 아십니까」라고 대담하더라는 겁니다.
「전 장군이 발을 빼려 해도 이미 뺄 수 없게 돼 있다」는 말이었어요.
이 면담이후 전 장군은 결심을 굳힌 뒤 구체적으로 집권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통령직을 불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최 대통령께 열흘 가량 시간을 두고 재고해 보시라는 의미에서 설악산·경주·제주 등을 행선지로 한 휴가여행을 권했다」고 합디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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