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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은행주, 나는 증권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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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22면

며칠 전 저녁 자리에서 A은행장을 만났다. 자본시장통합법이 15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를 통과한 뒤였다. 대화가 자연스레 은행과 증권사의 앞날로 옮아갔다. A행장이 말했다. “언제는 증권사들이 법이 없어서 제대로 못했습니까. 자통법으로 결국 실력 좋은 외국계가 시장을 독식할 거예요.” 업무 칸막이가 없어지고 갖가지 첨단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게 되면 결국 골드먼삭스ㆍUBS 같은 글로벌 금융 고수들 배만 불린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선 약진의 발판을 마련한 증권사에 대한 경계감을 읽을 수 있었다.

“형님, 이제 상석에서 내려오시죠”

증시 활황에 때맞춘 자통법 통과 소식에 증권사들의 주가가 급등했다. 업계 대표주로 꼽히는 삼성증권의 경우 올 2월 초 4만6000원대였던 주가가 22일 현재 7만4200원으로 60%나 뛰었다.

이에 비해 은행주들의 행보는 답답하기만 하다. 리딩뱅크인 국민은행의 주가는 2월 초 이후 이제껏 9% 오르는 데 그쳤다. 최근 증시 호황이 ‘남의 집 잔치’인 셈이다.
형님과 아우로 영원히 간극을 좁히지 못할 것만 같았던 둘의 주가는 이렇게 조우(遭遇)할 수준에 이르렀다.

증권사들은 자통법으로 중장기 실적과 주가가 더욱 빛날 것이란 찬사를 듣는다. 반면 은행 쪽에선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탄식이 자주 흘러 나온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21일 “은행 경영의 난이도가 또 한 단계 올라가고 있다”며 “순이자마진(NIM)이 예상보다 빨리 줄어들고 증권업계의 공격적 자산관리계좌(CMA) 판매로 예금 이자율이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은행주와 증권주의 행보는 어떻게 될까. 은행주 투자자들은 이제라도 증권주로 갈아타야 하는 것인가.

사실 은행들의 돈벌이는 지금도 좋은 편이다. 문제는 계속 수익을 늘려나갈 성장 모멘텀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겨우 현상을 유지하든지 조금씩 나빠지는 분위기라면 주식을 계속 보유할 의욕을 갖기 힘들다. 주가는 꿈을 먹고 상승하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부실 대출에 대비해 쌓아두었던 충당금이 순익으로 되돌아오고 주택담보대출 수익이 급증하면서 최근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올 들어서는 마땅히 돈을 굴릴 곳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증권사 CMA가 뜨면서 싼 이자를 주는 보통예금 잔액이 자꾸 줄어드는 것도 고민이다. 주택담보대출이 막히자 중소기업 대출과 신용카드 영업을 강화하고 있지만 금융감독원의 태클에 밀려 애를 먹고 있다. 해외시장 공략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큰돈을 벌 실력은 못 됐다.

반면 증권사들은 생기가 넘친다. 펀드투자 붐과 주가 상승으로 돈벌이가 좋아지는 가운데 자통법에 따른 새로운 먹거리 창출 기대에 들떠 있다. 정부가 신규 증권사의 설립을 허용하면 경쟁이 심해져 먹을 파이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는 지난 주말에 증권주가 하락 반전한 이유였다. 하지만 증권사가 새로 만들어져 시장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증권사 신규 설립으로 기존 증권사들 간의 인수합병(M&A)을 촉발하면 주가에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경쟁 촉진은 능력 있는 증권사들의 힘을 더욱 강화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대한투자증권 한정태 연구원은 “정부가 자통법과 증권사 신설 허용을 통해 금융업의 새 성장축을 증권업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중장기 비전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적어도 3년, 10년을 본다면 증권주가 우세승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물론 이게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먹고 살 좌판은 크게 깔렸지만 팔릴 물건을 내놓을지는 여전히 두고봐야 한다. B국회의원은 “정부가 자통법안을 들고 왔기에

‘신상품 내놓을 인력은 제대로 있느냐’고 반문했지만, 나중에 갖고 온 자료를 보니 너무 궁색해 혀를 찼다”고 말했다.

또 자통법 이후 기업금융의 중요한 한 축은 증권사들이 자기 돈으로 하는 투자(자기자본 투자ㆍprincipal investment)인데, 이는 자기자본 덩치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돼야 가능하다. 외국계 증권사들은 평균 자기자본이 31조원 수준이지만, 국내에선 2조원을 넘는 증권사가 우리ㆍ대우ㆍ삼성ㆍ한국 등 4개 정도다. M&A와 증자 등으로 자기자본을 확충하는 한편 이 돈을 제대로 굴릴 인재확보와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등이 증권사들의 큰 숙제다.

그렇다면 앞으로 은행들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일단 전통적인 예금ㆍ대출이 주력인 상업은행 모델에 안주해선 힘들 것이란 분석이 많다. 그런 면에서 지주회사 체제는 은행ㆍ증권ㆍ보험 등을 아우르고 있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주회사 형태를 갖추지 못한 국민은행이 증권사 설립에 조바심을 내는 이유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노진호 박사는 “미국도 대공황 이후 60년 금기를 깨고 99년에‘그램 리치 브릴리법’을 시행해 은행ㆍ증권사 간 겸업을 전면 허용해 대형 은행과 증권사의 결합이 본격화됐다”고 했다. 그는 “큰 흐름을 보면 국내 은행들도 예대마진 쪽에서 자산운용이나 투자은행(IB) 쪽으로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은행들이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신한금융지주 최범수 전략담당 부사장은 “증권사 부상은 필연적인 큰 물결로 보지만 3년 만에 은행에 다시 와보니 이쪽도 변화가 엄청나다”며(그는 국민은행 전략담당 부행장이었다) “자본력이나 고객이 인정하는 네트워크 등에선 은행이 우위이고 증권사 중 자통법 목표를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은행권에선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막 출발선을 떠난 증권주와 은행주의 주도권 다툼의 결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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