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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초왕」갑부가 중국서 새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은퇴 후 5년동안 세계일주여행과 골프로 세월을 보내면서 「아! 나는 이렇게 가치 없이 늙어 죽을 작정인가」하는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또 일이 그리웠고 건강에 신경을 쓰면서 「일이 곧 보약」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아내의 생일날, 해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캘리포니아 해변에 앉아 아내에게 고생이 되더라도 함께 보람있는 일을 하다 죽자고 부탁했어요.』
70년대 미국한인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화초왕」으로 손꼽혔던 재미교포 허옥씨(67·흑룡강 화미 이탄공사장)가 중국만주벌판을 헤맨지 9년만에 「이탄왕」으로 변신했다.
「아내와의 합의아래」그가 지금하고 있는 일은 중국 흑룡강성 광활한 전인미답의 대평원에 수천년간 갈대와 잡풀이 자라고 썩어 퇴적해 이룬 지층인 이탄층을 거둬내 유기질 비료로 활용하는 사업이다.
그가 이탄 개발사업에 착수하게된 것은 그 자신 미국에서 20년간 화초재배사업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화초는 물론 인간을 이롭게 하는 땅의 보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그는 땅의 황폐함과 화학비료의 폐해를 막는 방법으로 유기비료의 공급원인 이탄층을 찾아 개발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착안을 하게 됐다는 것.
그가 남은 여생을 흙에 파묻으리라고 결정한 곳은 흑룡강성 하얼빈시에서 차로 10여시간 달려 가목사시에 이른 후 다시 70여㎞의 황토길을 달려야 하는 신가점이라는 오지. 그의 탐사결과 중국전역의 3백여 이탄 분포 지역중 가장 이탄의 질이 우수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는 이 이탄층을 찾아내기 의해 캐나다 이탄 전문가·통역을 대동하고 83년부터 3년간 배낭을 메고 중국전역을 아내와 함께 누비고 다녔다. 지금도 별 차이가 없지만 대외적으로 전혀 개방이 안된 당시의 중국 산골은 말로 이루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험악한 오지였다.
사서하는 고행의 길목에서 때로는 미국에 두고 온 「궁궐 같은 집」과 그들 부부가 은퇴 후 즐겼던 호사스러웠던 일들이 떠올라 그들을 갈등 속에 몰아넣기도 했다는 것. 허씨 부부는 온종일 돌아다니다 헛간 같은 곳에 몸을 뉘면서도 밤에는 조선족 통역으로부터 중국말을 배우는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허씨는 3년만인 86년 만주벌판에서 황폐해진 땅에 영양제구실을 할 수 있고 유기질성분이 높으며 병균이 없는 질 좋은 이탄층 60만평을 발견하고 중국 흑룡강성 정부와 합자 개발사업 계약을 했다.
허씨의 이 개발사업은 외국인으로서는 흑룡강성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성주민과 언론사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가 발견한 갈대 이탄층은 깊이가 평균1∼l.5m로 5천년∼1만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
그는 87년부터 핀란드·캐나다로부터 이탄 전용개발기계 30여대를 들여오고 인부와 직원 30여명을 고용해 물이 고인 이탄층에 대규모 배수시설을 하는가 하면 잡목과 잡초제거작업에 돌입했다. 결국 조사작업에 3년, 개발준비작업에 4년 등 모두 7년여만인 지난해부터 이탄을 걷어내 팔 수 있는 사업단계에 접어들었다.
장마와 추위를 피해 이탄을 걷어낼 수 있는 기간은 연중 고자 70일. 허씨는 매일 30여명의 인부를 동원해 이 기간중 약12㎝정도 두께에 달하는 이탄층을 위로부터 걷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도 무공해 채소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해 중국 국무원의 고위층들은 거의가 그의 이탄비료로 재배한 채소만을 밥상에 올린다고 자랑했다.
허씨는 원래 화원이나 비료 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선맥주 상무출신. 그가 미국에 가 화원사업을 하게 된 것은 전혀 엉뚱한 이유에서였다.
67년 미국에 유학을 간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아들을 돌보러 허겁지겁 미국에 가야했다.
그사이 조선맥주 사장이 바뀌는 등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아 버렸다.
그는 한국에 떨어뜨리고 온 아내(61·한정남씨)와 두 딸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당시로서는 영주권이 잘 나온다는 화원사업에 무조건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평소 모종삽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았던 그에게 실내장식용 화초를 키워 일반화원에 공급하는 일은 보통 무리가 아니었다. 시련은 만만치 않았다. 잘 자라던 화초들은 어느날 별안간 병이 나거나 모두 타 들어가기 일쑤였고, 난로과열로 비닐에 불이 불어 두번이나 화원이 불타는 등 시련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이를 악물며 일에 매달렸고 결국 3년만에 가족을 모두 불러들일 수 있었다.
가족이 주는 위안은 대단한 의욕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매달리면서 6천평의 농원에서 자란 그의 화초들은 아름다운 윤기를 뽐내게 되었고, 결국 허씨가 재배한 화초들은 「미국서부지역 최고」의 상품으로 꼽혀 가장 고가로 시장에서 날개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그는 돈을 「삼태기로 거둬들였고」, 번 돈은 모두 부동산에 투자해 70년대「한국인 갑부」로 미국사회의 시선을 끌었을 정도. 그는 53세 때 아들에게 농원을 물려주었다.
세살 때 부모를 따라 20년간 중국연변(당시는 일제하에 있어 중국어는 배우지 못했음)에 살았고 한국에서 20년, 미국에서 20년을 살다 다시 만주벌판에서 20년의 새 삶을 기약하는 그는 『인간은 유한하고 땅은 영원하다』며 「화학비료를 아편, 유기질비료를 보약」에 비유했다.【중국 흑룡강성=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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