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스포츠맨만큼만 하시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문석(文石) 김성집(83) 대한체육회 고문은 해방 후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다. 40세까지 선수로 뛰다 은퇴했고 76년부터 94년까지 태릉선수촌 촌장을 지냈다.

선생의 성품은 대쪽 같으면서도 몹시 자애로웠다. 선수촌장 시절, 선생은 미혼의 남녀 선수들을 보면 어떻게든 인연을 맺어 주고 싶어 했다. 여자농구 스타 박찬숙씨도 "김성집 촌장님을 통해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선수촌을 드나드는 총각 기자들도 눈여겨 봤다. 어느 날 괜찮다 싶은 총각 기자를 발견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어떤 종목에서든 대표선수가 됐다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재능도 있고, 육체적으로도 강하지요. 그리고 머리가 좋습니다. 머리 나쁘면 절대 운동으로 성공 못해요. 여기(선수촌) 들어온 여자 선수들이야말로 최고 신붓감이오. 건강하지, 영리하지, 단체생활을 해 봐서 사람 반듯하지. 마음에 드는 선수가 있거든 얘기하구려. 내가 중매 설게."

애석하게도 그 젊은 기자는 운동선수 아닌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고, 곧 언론사를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성집 선생의 담담한 권유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스포츠인 커플이나 스포츠인과 결혼한 분들을 자주 보지만 대개 금슬이 좋고 자녀 교육도 훌륭히 해낸다. 어렵게 생활할지언정 행복해 보인다. 스포츠인 부부의 이혼은 흔치 않다.

스포츠인을 '무식한 운동선수'로 치부한 시절이 있다. 허약한 책상물림들의 무식한 예단이다. "스포츠인이 학식이 부족할지 모르나 결코 무식하지는 않다"는 안용규 한체대 교수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다. 스포츠맨 가운데는 운동을 마치고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놀라운 학문적 성취를 이룬 분이 적지 않다.

스포츠인은 숨이 턱에 차는 극한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을 평생 해 온 사람들이다. 편안히 앉아 머리를 굴려온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판단력과 사고력을 갖고 있다. 당대 최고의 농구 스타였던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는 은퇴 후 금융기관에서 최고경영자로 일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 전 총재의 성공은 스포츠가 가진 본질의 승리다.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규칙이다. 규칙이 있느냐 없느냐가 스포츠냐 아니냐를 결정할 정도다. 축구가 근대 스포츠가 된 것은 1843년 '케임브리지 룰'이 만들어진 뒤의 일이다. 주먹질.발길질 등 폭력 범벅이던 풋볼은 케임브리지 룰을 통해 야만성을 걷어냈다. 그래서 방열 전 경원대 교수는 강의할 때마다 "스포츠는 규칙이 경기에 선행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스포츠인은 규칙 지키기를 본능화한 사람들이다. 친한 친구와 골프를 쳐도 규칙을 따진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못한다. 3m5㎝ 높이에 걸린 농구 골대가 너무 높아서, 폭 7m32㎝.높이 2m44㎝인 축구 골대가 너무 좁아서 "못 해먹겠다"고 불평하는 선수는 없다. 폭행과 다름없는 백태클을 금지한다고 해서 규칙 개정을 들먹이는 선수도 없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므로 나라의 어른들이 '그놈의 헌법'을 들먹이며 걸핏하면 못 해먹겠다고 상소리를 하는 현실 앞에서 구역질이 날 수밖에 없다. "어지럽고 복잡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은 모르겠다"는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곤란하다. 정말 무식해서, 또는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뻔히 있는 원칙이 무시되는 세태 앞에서 느끼는 이들만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스포츠가 뭔지 모르는 분들, 운동이 뭔지 모르는 분들, 너무 잘난 척할 것 없다. 물론 스포츠맨들은 여러분을 보며 "당신보다 내가 낫다. 나만큼만 하라"고 건방을 떨지도 않지만.

허진석 중앙SUNDAY 스포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