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중흥회서 85년부터 추도식 10주기 땐 근혜씨측과 별도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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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5·16참가도 사실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유신 때는 정말 고민했었다. 그 동안 나의 원칙은 어른(박대통령)의 목적이 뚜렷한 이상 내 철학이나 소신과 다르더라도 그분 하는 일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80년2월 관훈클럽 기자회견에서의 김씨 발언) 한 관계자에 따르면 박근혜씨는 김씨의 이 같은 말을 접하고 『이제 와서 상황이 바뀌니까 혼자 발뺌하려 한다』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 같은 불화의 배경에는 물론 5공 초기 강압적 권력의 의도가 작용했다.

<초청장 배달 안돼>
윤주영 전 문공부장관(64·전 유정회의원)의 회고.
『5공은 심지어 박대통령 추도식마저 못하게 했어요. 80∼81년에 걸쳐 각 언론에 박대통령을 매도하는 내용의 「비화」들이 경쟁적으로 실린 것이 무얼 뜻하겠습니까. 나는 일부 정치군인들의 불법적인 정권찬탈행위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는 방편의 하나였다고 봅니다. 고 박대통령의 5주기(84년)를 앞두고 나를 비롯한 전직장관 몇 명이 당시 안기부장을 방문한 일이 있어요. 「이번 5주기 행사는 꼭 모셔야겠으니 양해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그러나 그쪽 대답이 「추도식은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말이 먹히질 않더라고요. 결국 그해에도 추도식을 열지 못했습니다.』
85년들이 추도식은 정식으로 치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권측은 여전히 껄끄러워했던 모양이다 민족중흥회 간부 P씨의 말.
『행사를 앞두고 초청장을 보내도 그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어요 우편물이 주소지에 늦게 도착하거나 아예 행방불명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어쨌든 해마다 추도식은 열렸는데, 89년도 10주기 때 이번에는 박근혜씨측에서 추도식을 주관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같은 추모단체끼리 갈등이 일었지요. 모양사납게 된 겁니다. 박씨측에서 유가족 우선이라는 점을 내세워 국립묘지측과 먼저 교섭을 끝내는 바람에 우리(민족중흥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여는 것으로 추모행사를 대신했습니다. 「위대한 생애」라는 제목으로 박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화보집이었어요. 그쪽은 그쪽대로 묘소에서 행사를 열었고요. 양측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음해 11주기 때부터는 함께 모여 비교적 제대로 추도식을 치렀습니다.』

<이듬해 함께 추도식>
현재 박근혜씨는 일절 인터뷰를 거절하며 자택에 칩거하고 있어 그의 심정은 전할 길이 없다.
84년 창립된 「민족중흥회」는 3공화국의 여당·행정부 인사들이 주축이다. 작고한 이효상씨의 뒤를 이어 2대 명예회장에 취임한 김종필씨가 매달 30만원, 전예용 회장이 20만원, 부회장단이 각각 10만원 등 회원(2만7천 여명 추산)들이 직책에 따라 내는 월회비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민족중흥회는 올해 13주기 추도식을 계기로 기념관·동상건립·전기출판 등 박대통령을 기념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위해 기금을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법인형태의 추모단체 외에 3공 시절 박대통령과 갖가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은 소규모 모임을 조직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청호회(회장 윤덕병 한국야쿠르트유업 회장·65)」는 이름 그대로 청와대 경호원 출신들의 친목단체다 .
「오월회 」는 5·16민족상 수상자들의 모임이며, 「수형회」는 육영수 여사 추모회 장학금의 수혜자들, 「은행나무동우회(회장 윤주영)」는 옛 공화당 사무국 요원들의 단체.
친목단체들 중 두드러지게 활발한 모임으로 정수장학회 장학생출신들의 「상청회(회장 김기춘 전 법무장관·53)」가 있다..
현경대·정기호·김기도씨 같은 현직국회의원들도 이 모임의 멤버로 전국적으로 8천여 명의 회원이 있다.
부산일보·문화방송 등 당초 김지태씨의 소유였다가 5·16직후 군사정권으로 넘어간 재산(당시1억여원)이 이 장학회의 기금이 되었다.
「5·16장학회」였던 명칭은 82년 들어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를 따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기금의 성격과 상관없어 5·16장학금은 60년대 초반의 그 어려웠던 시절에 몇 안 되는 장학금 중 가장 많은 액수였어요, 63년도에 대학원(서울대법대)시험을 치렀는데, 내가 문과수석을 했더군요. 대학본부에서 오라고 해 갔더니 그 장학금의 수혜자로 선정됐다는 통보였습니다. 학업에 큰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설립자인 박대통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등록금 마련하느라 다들 허덕이던 시절이라 그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서 동료학우들간에 말이 나는 분위기는 물론 아니었지요. 대학졸업 후에도 장학금수혜자라는 이유로 별다른 도움이나 피해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김기춘씨)

<일반시민 호응 기대>
『나도 학과수석을 한 덕택에 63년도에 5·16장학금을 받았는데, 액수가 1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이공계 등록금이 7천6백원이었어요. 나머지 돈으로 책을 살 수 있었지요.』(김귀곤 서울대교수·현 정수장학회이사장)
박대통령의 「유업계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잡음들은 새삼 절대권력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민족중흥회의 한 원로인사는 『이번에 시작한 박대통령 기념사업 기금모금에는 제발 일반시민들의 1만원 짜리 소액입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그 돈으로 동상을 만들어 세우더라도 4·19때의 이승만 박사 동상처럼 군중들에 의해 쓰러뜨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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