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비르텍 봉토분|스키타이 곡옥 등 신라와 흡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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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알타이산은 백두산(중국 측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름)과 같이 우리의 먼 추억이 깃들여 있는 고향과 같다. 언어학적으로 우리민족과 관계 있는 어족으로는 고 아시아(혹은 고 시베리아)와 알타이어족이 있다. 우리의 언어가 알타이 공통조어에서 다른 어군보다 이른 시기에 분리되었으며, 언어연대학으로 보면 그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6천 2백∼5천 5백년 전으로 추정된다. 우리와 같은 계통의 일본어와의 분리는 4백∼6백년 전으로 보고 있다.

<친근한 이름「알타이」>
우리는 황인종 중 예맥 퉁구스이므로 인종적으로도 이곳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다. 생화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직적 합성항원의 유전자 빈도수로 볼 때 한민족은 북 몽고 갈래이며 약 1만 3천년전 후 빙하기 시대인 충적세의 따뜻한 기후와 함께 바이칼호를 떠나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지문·콩팥의 흰자질·쓸개의 붉은 홋집(ADA)·항체 유전자·혈청촉진 흰자질 등으로 볼 때에도 우리 민족은 만주·몽고·티베트·브리야트·아이누·꼬략족 등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살고 있는 시베리의 중심이 알타이라고 볼 때 알타이는 우리의 잊어버린 고향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알타이 산의 경우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방문이기는 하지만 항상 다녔던 것처럼 익숙하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보며 순간순간 카메라에 담았던 장면은 먼 추억의 낮 익은 모습을 더듬어 기억해내는 것 같다. 몽고·중국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간지역의 의미인 고르노 알타이는 몽고·중국으로 나뉘어 있다.
이곳은 이전까지는 알타이 족의 자치구였으나,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인종적·민족적 독립이 곧 이루어질 것 같다. 알타이 족,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학카스와 야쿠트 족 등과 같이 퉁구스 족 중 터키 계에 속하며 우리와 사촌 격이 된다. 실제로 신강성(신강성)국경지대에 다가가 이들을 만나보면 먼 옛날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누었으리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알타이 산맥 중 4천 5백 6m의 데일 높은 베루하 산을 넘으면 해발 2천 2백∼2천 3백m분지에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이곳이 우코크 분지며 비르텍(베르텍)과 아크하라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주위의 제일 높은 산은 따반·∼보고도-올라 라는 만년설로 해발 4천 82m다. 여기에서부터 발원하고 있는 것이「희다}는 의미의 아크하라 강이며, 이것은 다시 노보시비르스크 시를 관통하는 오브강의 상류를 이루게된다. 이 강은 만년설이 녹아 흐르기 때문에 우유 빛 처럼 희다. 직경 2∼3㎞의 분지 내에는 신석기 말·청동기초의 아파나시예보 문화부터 스키 타이(파지 리 )·흉노·터키·카자흐의 유적이 순서대로 나타난다.
그만큼 이곳은 당시 유목민들의 선호대상 지역이었으며, 또 문화교류의 중심지가 된다는 의미도 된다. 인종도 초기의 아파나시예보나 스키타이의 백인종(코카소이드)으로부터 후기의 흉노(훈)와 터키인의 황인종(몽골로이드)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칭기즈칸의 황인종의 무대가 하바로프 장군을 앞세운 제정러시아의 동진 정책에 의해 이곳은 다시 완전한 백인종의 무대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는 이제까지 이곳에 살아오던 몽고와 터키계의 황인종이 완전치 사라져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토착민은 황인종>
백인통치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토착민으로 삶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적인 권력만 없을 뿐이다. 시베리아는 그만큼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교류지인 셈이다. 이는 미국에서 백인과 토착 인디언의 관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우리가 도착하던 날 비르텍 지구 아크하라 구역에서 후기 스키타이 봉토분의 발굴이 완료되었다. 작은 것(직경 20m)은 6∼7세기의 어린 소년의 것으로 머리에는 금관, 목에는 금목걸이, 귀에는 금 귀걸이를 달고 누워 있었다. 이는 1947년 루덴코에 의한 문신이 있는 백인종과 황인종으로 이루어진 한 쌍 부부의 무덤이 발굴된 이래 세계적인 주목을 방은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직경 30m로 기원전 7∼8세기 스키타이 전기의 무덤이다, 이 속에서 장년의 사내가 가죽지갑에 넣은 청동 검을 허리에 찬 채 발견되었다. 그 위에는 이 남자가 평소 타고 다녔으리라 생각되는 네 마리 말이, 그리고 평소 부리던 하인인 듯한 여덟 사람의 머리만이 순장된 채로 놓여 있었다. 이들 두 무덤은 부자지간의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 소년도 아버지와 같이 살아 생전의 권력을 그대로 향유한 듯 호사스런 장신구를 몸에 지닌 채 묻혀 있었고, 또 그 아버지가 되는 주인공도 여덟 명의 순장자와 함께 커다란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부자의 무덤 추정>
이것은 권력사회의 세습신분을 잘 반영해준다. 스키타이인들과 우리의 문화와는 동물문양의 전파. 청동제 항아리, 곡옥의 문양, 그리고 신라에서 발견되는 적석목관분 구조의 유사함으로 깊은 친연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무덤들은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인 채로 나타리 폴로시마크 여사의 지휘아래 이 세상에 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의 부군으로 준 아카데미회원인 몰로딘 비아체스라프 박사도 이웃 우코그 지역에서 아파나시예보--타가르-흉노-튀르크의 여러 고분들을 발굴해 이곳 문화의 편년체계를 서서히 수립해나가고 있다. 그는 올해 원광대학교 초청으로「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이곳의 발굴을 직접 맡은 당사자의 입을 통해 한국문화의 원류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본다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기별로 다른 문화의 유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문화전통이 아니라 시대별로 나타나는 여러 갈래 문화의 기원을 찾아보는 작업이 계속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는 한국문화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함을 의미한다. 이번 시베리아여행 역시 이러한 문화기원을 찾기 위한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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