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황진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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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대뜸 한번 여쭤보지요. '욕보이소'는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까요. 영화 '밀양'의 첫 부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주인공 신애의 자동차가 고장나자, 지나던 트럭운전사가 도움을 주고 떠나면서 던지는 인사말이지요. 칸영화제에 소개된 영어자막에는 'Good Luck'으로 옮겨졌더군요. 번역자가 꽤 고심했을 텐데, 우리말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사투리에 담아낸 영화 전체의 미묘한 맛 역시 번역 자막으로는 전달이 어렵더군요.

역시 칸영화제에서 본 북한 영화 '한 여학생의 일기'에도 눈길 끄는 자막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과학자 아버지가 모처럼 집에 돌아온다니까, 할머니가 단고기를 준비하겠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영어자막은 'dog'대신, '단고기'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해 고유명사처럼 옮겼더군요. 서양관객으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는 듯싶었습니다.

영화에는 국경이 없다고 합니다. 감동의 보편성을 이르는 말이죠. 그런데 그 감동의 어느 대목을 잘라내면, 그 말과 문화에 젖은 사람이 아니고는 만끽하기 힘든 맛이 2%쯤 있곤 합니다.

그 반작용일까요. 지난주 개봉한 '황진이'는 무엇보다 대사의 감칠맛이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하루 비둘기 재를 못 넘고, 늙은 말이 길을 안답니다." 이건 황진이가 기생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밝혔을 때, 진이를 길러준 할멈(윤여정)이 자신의 오랜 경륜을 밑천 삼아 곁을 떠나지 않고 돕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랍니다. 또 이런 대사도 있지요. "소견머리 없는 계집들이 금방 마시고 난 우물에 침을 뱉는게야." 이건 황진이가 목적한 바를 위해 하룻밤을 보낸 뒤 싸늘한 태도로 돌아서자 송도 사또(류승룡)가 내뱉는 대사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가락이 맛을 더합니다. 이 대사가 실린 원작소설을 다시 읽고픈 생각이 간절해지더군요. 알려진 대로, 이 영화의 원작은 2002년 발간된 북한 소설 '황진이'지요. 황진이에 대한 해석과 입체감 있는 인물구성의 솜씨가 대단합니다. 소설에 실린 단어 중에는 흔히 쓰지 않는 낯선 표현이 적지 않은데도, 어느 순간 빠져들면 술술 읽어 내려가게 됩니다. 3.4조, 4.4조의 가락이 문장 전체에 흐르는 덕분이지요. 말의 힘이란, 말뜻(語義)만이 아니라 억양과 운율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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