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잡기 어려운 일본행 「노심」/큰 현안없고 일 정계도 뒤숭숭한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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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새로운 동북아구도 논의가능성/곤경 일 총리 입지살리기 추측도
노태우대통령이 내달 8일 일본을 방문해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번 방일은 노 대통령의 임기중 11번째 외국 나들이가 되지만 왜,꼭 가야하는지 명확한 설명이 없어 어느 때보다 성격이 모호하다.
정부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임기전에 불편해진 양국관계의 짐을 덜어주고 가겠다는 의도에서 이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 1월 미야자와총리가 취임후 첫 해외방문지를 한국으로 택했으나 한국내 여론이 비등해 양국관계는 오히려 악화돼 버렸다.
이러한 결과를 만든 노 대통령 스스로 이 매듭을 풀어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것은 이번 회담에서는 양자문제가 원칙론 이상으로 진전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먼저 양국의 현안중 정신대문제는 일본측이 해결방안에 대한 운을 떼어놓았지만 한국정부가 오히려 대통령선거의 이슈로 부각될 것을 두려워해 선거이후에 논의하자고 미루고 있는 형편이다.
무역역조문제는 한국여론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지난 6월말 이미 보고서가 나왔고 획기적인 개선책은 나올 수 없게 돼있다. 과거 잦은 부시 미 대통령과의 회담이나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의 제주도 방문때도 구체적인 의제가 없다는 여론의 지적이 있을 때 정부는 「정상간의 인간적인 교감」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부여를 해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잔여임기를 감안할 때 공인으로서의 교분유지라는 명분도 걸맞지 않은 것 같다.
결국 문제는 제3국을 포함하는 지역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외무부 관리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만의 「비공식 실무방문」에서 동북아안보체제 같은 「공식적 선언」은 있을 수 없다. 러시아의 옐친대통령이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려다 이를 취소하고 11월18일 한국만 방문하려는데서 러시아가 한국카드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고 있다는 기분을 일본이 느끼고 있는 점이다. 더구나 한중수교까지 겹쳐 동북아의 신질서 구축과정에서 일본이 중국·러시아는 물론 한국으로부터까지 견제되고 있다는 고립감을 느끼고 있으며,이는 일본의 진로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러 정상회담 직전에 한국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러시아의 대일 한국카드를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외국방문이 여론의 거센 반발을 받게될 것이란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이를 추진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외무부도 이런 평가를 근거로 방일이 적절치 못하다는 건의를 했으나 청와대측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강행하게 된 것이라고 외무부의 한 소식통은 전했다. 이런 「정치적」판단뒤에 한일간의 다른 막후거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지만 임기말의 노 대통령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결국 외무부조차 납득하지 못하는 회담이 추진된 것은 비정상적인 외교경로를 통해 추진돼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한 소식통은 한중정상회담직후 일본을 방문한 김종휘청와대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오재희주일대사 선에서 추진돼온 것이라고 귀띔하고 있다. 당국자 역시 김 수석의 추진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경위를 감안할때 당초 한일중 어느 쪽이 이런 방문을 제안했느냐는 문제는 당국자의 확인 거부와 관계없이 한국측이 주도해 추진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청와대측은 외무부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방일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는 것이다.
미야자와총리는 사가와 규빈(좌천급편)사 사건의 충격으로 내각지지율이 사상 두번째로 낮은 14%를 기록하고 있는 등 불안한 상태다. 여기에는 그의 연초 방한 실패도 한가지 요소가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배려로 이루어지는 방일이라기에는 그 형식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다.
노 대통령은 일요일인 8일 오전중 일본으로 떠나 회담을 마치고 오후에 바로 귀가하는 실무방문형식을 취하게 된다. 또 장소도 그같은 격식을 배제한 협의의 성격에 맞춰 동경이 아닌 제3의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일요일 하루로 방문날짜가 정해진 것은 11월 내내 일본에는 국회가 열려 총리가 하루종일 국회에 출석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형식적으로도 일본정부의 초청에 의한 공식 방문이 아닌 비공식방문으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다만 노 대통령이 국내에서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야자와총리의 입장을 살려주기 위해,러시아의 대일 견제를 무산시키기 위해 격식을 넘어 일본을 방문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여론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총리를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최근 혐한분위기가 확산되는 일본내 대한인식을 개선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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