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걷기' 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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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옥 이사장(中)이 5일 오후 주민들과 함께 원주종합운동장 트랙을 걷고 있다.[원주=변선구 기자]


해질 무렵, 강원도 원주종합운동장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이들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뒤 육상 트랙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오후 8시쯤에는 수백 명이 트랙을 걷는다. '걷기의 메카' 원주의 경기장과 공원, 학교 운동장에서 저녁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원주에 걷기 열풍을 몰고온 사람은 이강옥(54.상지대 예술체육대학장) 교수다. 원주에 본부를 둔 대한걷기연맹의 이사장과 한국걷기과학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에 걷기 운동을 소개하고 체계화시킨 주인공이다.

이 교수는 중동고와 국민대에서 축구를 한 선수 출신 체육학 박사다. 그가 걷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전공인 운동 처방을 공부하다가 당뇨.고지혈증.고혈압 등 성인병의 처방에 '걷기'가 꼭 들어가는 걸 알게 됐다. '환자 처방이 아니라 성인병 예방과 스포츠로서 걷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연구를 하던 그는 일본에서 걷기대회가 열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88년 일본 이다시 국제걷기대회에 참가한 그는 수만 명이 모여 즐겁게 얘기하면서 숲속 길을 걷는 모습을 보고 '이거다' 싶어 무릎을 쳤다. 일본 사람들은 "걷기 운동의 종주국인 네덜란드에 가 보라"고 얘기해 줬다. 인구 12만 명의 소도시 나이메겐에서 매년 열리는 네덜란드 국제걷기대회에는 3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출전한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이 대회는 올해가 91회째다.

이 이사장은 국제걷기대회 조직위원회를 만든 뒤 96년 제1회 원주 국제걷기대회를 열었다. 당시 공무원들은 "걷기가 무슨 대회가 되느냐. 보리밭이나 밟으면 되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 대회는 학생들을 동원해 5000명 정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걷기의 즐거움을 안 아이들이 부모와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서 매년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10월에는 무려 3만4610명이 참가했다. 국제걷기대회 조직위원회는 지난해 명칭을 대한걷기연맹으로 바꿨고, 전국 16개 광역시.도에 지부도 만들었다.

이 이사장은 지금도 하루 평균 14~18㎞를 걷는다. 공인된 걷기 기록만 1만㎞를 넘고, 비공인까지 합치면 지구 한 바퀴(약 4만㎞)는 돌고도 남았을 거라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금요일 저녁에 원주에서 출발, 밤을 꼬박 새우면서 토요일 오후까지 22시간 정도를 걸어서 110㎞ 떨어진 경기도 구리의 집까지 간다. 그는 "걷기는 자신과의 데이트"라고 말했다. 걸으면서 자신과 대화하고, 수많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은 '1.2.3 운동'도 벌이고 있다. ^버스 한 정류장 앞에서 내려 걷기 ^2㎞ 이내 걸어가기 ^3층까지는 계단으로 걸어가기다. 중앙일보가 '워크홀릭' 캠페인을 시작한 것을 보고 백만 원군을 얻은 기분이라는 이 이사장은 "중앙일보와 대한걷기연맹이 공동으로 '전국 걷기 좋은 길 선정' '걸어서 출퇴근하는 직장인 표창' 등 걷기 보급 사업을 전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주=정영재 기자<jerry@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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