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책임제의 망령/김호진(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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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자당의 최고위원이던 박태준씨가 내각책임제를 민자당의 대선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가 마침내 당적까지 버리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6공 출범이래 단속적으로 논란을 거듭해온 내각제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으며,내각제의 당위성과 적실성 여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새로이 고조되고 있다.
박씨의 내각제 요구가 자신의 확고한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탈당의 명분을 찾기 위한 임기응변적인 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두고 느닷없이 내각제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유용성도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다.
○필요조건 아직 못갖춰
현실적인 유용성을 논의하지 않았다는 말은 한국의 경우 내각제의 채택은 아직도 시기상조인데 박씨는 이점을 간과했다는 의미다. 왜 내각제는 아직 시기상조인가. 단적으로 말해 한국사회는 여전히 내각제의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내각제가 성공하려면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야 관료들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고 잦은 내각교체와 상관없이 국가행정이 능률성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관료풍토는 어떠한가. 한준수군수의 양심선언이 말해주듯이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기는 커녕,정치의 풍향에 따라 행정이 춤을 추는 전근대적인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내각제가 갖추어야 할 두번째의 필요조건은 군의 정치적 중립이다. 제2공화국의 실패와 좌절이 단적으로 실증하듯이 내각제는 구심력이 약한 체제이기 때문에 정파간의 반목과 대립이 격화되고 정국이 표류하기 쉬운 것이다.
이 틈을 비집고 흔히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기 때문에 군부의 정치적 중립이 확립되지 않으면 내각제는 군부 쿠데타의 제물이 되기 쉽다.
○지자제부터 정착돼야
그러면 한국의 군부는 정치적으로 중립인가. 말할 것도 없이 법적으로야 중립이지만 5·16과 5·17의 선례가 말해주듯 성향면에서는 여전히 정치개입의 충동을 자극하는 이른바 「신직업주의의 유전자」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지방자치제의 정착이다. 내각제는 지방행정에 대한 통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지방자치제가 정착되지 않으면 지방행정은 방만해지기 쉬운 것이다. 한국도 최근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아직도 실험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섣불리 내각제를 채택하게 되면 지방행정의 난맥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네번째의 조건은 국회의원의 자질이다. 내각제는 국회의원이 정치기능뿐만 아니라 행정기능까지 담당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들의 자질이 이에 상응하지 못하면 행정은 효율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또 내각제는 타협의 정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정치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프랑스의 3,4공화국처럼 빈번한 내각교체로 정정이 혼미해질 우려가 있다.
○정략따라 바꿔선 안돼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내각제에 상응하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전문성과 도덕성이 대단히 의문시되며,14대 국회가 3·24총선 이후 6개월동안이나 원구성도 못하고 의정을 공전시켰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들의 자질은 아직 내각제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원구성도 제대로 못하는데 여·야당의 의석이 비슷할 경우 내각구성이 제대로 되겠는가. 그리고 그때의 행정공백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는 아직도 내각제의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막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바꾼다는 것은 정치적 도박이 되기 쉽다. 혹시 박씨의 내각제 주장이 「노심」과 일부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이해를 충족시키려는 정략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바꾸는 일은 역사발전의 순리와 국민의지에 소응해서 이루어져야지,특정 정파의 정략적인 판단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은 1948년 건국이래 여섯번이나 공화국을 바꾸었고 매번 특정인의 정치적 야욕에 따라 정부형태와 권력구조가 결정되는 후진성을 답습해 왔다. 우리가 정녕 정치의 선진화를 추구한다면 더 이상 이런 폐습이 용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은 정파이기주의에 탐닉하는 구태를 지양하고 국가장래를 걱정하는 대승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다음 선거보다는 다음 세대를,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권력구조 변경을 획책하기보다는 국가장래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우리에겐 요구된다.<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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