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외교관 박정희 일과"친숙〃 미와 "서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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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북변수호의 전위에 당하는 국군의 지도자가 되려고 호국의 열정에 타면서 이개년의 과정을 마친 금년도 육군군관학교 제이기 예과생도 강견상언 이하 ○○명의 졸업식은 이십삼일 국도교외 납납둔 동덕대 육군군관학교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동 교정에서 우대신 집행의 관병식을 한후 졸업생일동은 동교 무도장에 정렬, 생도대표 강견상언 소산중가 양군의 강연, 유·검도의 연련, 측도작업의 실습 등을 하엿다. 이리하야 열한시 오십분부터 다시 교정에 정렬한 후 졸업증서 수여와… 빛나는 우등생 강견상언 소산중가 고목정웅 등 오명에게 각각 은사상층의 전달이 잇고 폐식하였다.』
1942년 3월24일자 만선일보(만주국에서 한글로 발행되던 친일신문)는 20여년 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다가키 마사오(박정희의 창씨명) 생도가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고 있다.

<「교육칙어」줄줄외>
당시 박정희 생도는 25세로 동기생들보다 다섯 살 가량 나이가 많았다. 그는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 교사생활을 하다 단신 만주로 건너가 1940년 4월4일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수석으로 마친 뒤에는 일본육사(57기) 3학년에 편입, 역시 우수한 성적(3등)으로 졸업했다.
이러한 이력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 독립국가의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못한 출신배경을 지녔다는 세간의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군 장교출신이라는 박 대통령의 경력은 그의 통치시절에는 공개적으로 거론될 수 없는 금기사항에 속했다.
굳이 일제하의 사관학교·군경력을 들추지 않더라도 확실히 박 대통령의 정서나 체질은 일본식 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가 태어나고(1917년) 자란 시대가 일제치하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그 시대 한반도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한 것이기에 후세의 잣대로 무조건 매도하고 나서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선우련씨(63·전 청와대 공보비서관·국회의원)는 그의 친형 선우휘씨(작가·86년 작고)가 생전에 박 대통령과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청년시절과 그때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노릇이고, 박 대통령 또래에게는 그 시절이 일제하였다는 점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두 분이 술을 드시다 대통령께서 왕년의 대구사범학교시절을 회상하면서「임자, 아직도 칙어를 욀 줄 아나」고 물으셨지요.
경성사범 출신인 내 형님이「물론이지요」라며 먼저 외기 시작했어요. 교육칙어는 현재의 국민교육헌장보다 훨씬 긴 문장인데, 형님이 한동안 외면 대통령께서 그 뒷 문장을 받아 외고, 다시 또 형님이 받고 해서 두 분이 끝까지 다 낭송하시더군요. 40년 이상 지난 뒤에도 그걸 외고 있다니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한편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음에는 비교적 낯선 나라였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의장교가 된 박정희는 미군사고문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비사교적인 그의 성격 탓이 컸다. 당시만 해도 미군과 잘 어울려야 군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동부인해 미군들과 함께 파티를 벌이며 적당한 기회에 승진운동도 하던 일부 장교들을 그는 혐오했다. 이 때문에 미국 측은 5·16이 터진 뒤 박정희 장군이 도대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알아보느라 애를 먹은 흔적이 많다. 더구나 박 장군은 여순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군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직한 이력까지 있었다.

<엄청난 자료 확보>
박 대통령에 대한 미국 측의 경계심은 상당기간 지속됐다. 중앙정보부 간부출신 L씨(전 국회의원)의 증언.『60년대 중반 무렵이었습니다. 하루는 김형욱 정보부장이 나를 불러「미국이 각하에 대해 아직도 사상적으로 의심을 풀지 않고 있는 것 같다」며 걱정하는 거예요. 의논 끝에 도대체 어떤 점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보기로 했지요. 당시 국내에 와 있던 CIA책임자가 에드워드라는 사람이었어요. 면담을 신청해 반도호텔의 방에서 만났습니다. 우리 부장님이 걱정하던데, 당신들이 각하를 의심하는 근거나 좀 들어보자고 했지요. 에드워드가 먼저 내 얘기를 하더군요.「당신에 대해서도 신원조사를 다 해봤다. 해방 때부터 반공투쟁을 해 믿을 만 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박 대통령과 관련된 자료파일을 내놓는데, 우리 정보부가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상세하고 방대해 정말 놀랐습니다. 대통령의 사범학교시절부터 시작해 그 분의 직계가족은 물론 처족들의 이력까지 상세히 기록 됐더라고요.
에드워드는 또「박 대통령의 처가친척 중 일본이나 독일유학을 다녀 온 이는 여럿 있는데 왜 미국유학 출신은 한명도 없느냐」고 묻더군요. 내가 대신 변호를 했지요.「우리나라는 원래 의학 같은 자연과학과 철학은 독일을 제일로 치고 정치학은 미국을 손꼽는 풍토가 있다. 유학생들의 전공과목을 살펴봐라. 아마 자연과학 쪽이라서 독일·일본을 택했을 것이다.」고 말입니다. 나중에 에드워드도「그 점은 당신 말이 맞더라」고 하더군요. 아무튼「이 시간 이후로는 대통령의 친인척은 독일유학을 삼가도록 건의를 올려보겠다」고 말해 주었지요. 며칠 후 다른 일로 김형욱 부장과 함께 청와대에 보고하러 들어간 김에 에드워드를 만난 얘기를 했어요. 박 대통령께서 안색을 흐리면서도「미국사람들 정말 대단하구먼」이라고 감탄하시더군요.』
대단히 현실적인 실용주의자로서 박 대통령은 한일국교정상화를 단행했고, 안보면에서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긴밀히 연결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예스맨이 아니었다. 70년대로 넘어 오면서 방위산업, 특히 핵개발 문제와 우리 국내의 인권문제로 한미관계는 긴장이 풀릴 때가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청와대 도청사건이 터졌다.

<전 미대사가 시인>
76년10월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박동선 사건에 관해 보도하면서 『박동선에 대한 정보는 미국정부가 청와대와 주미한국대사관의 정보원으로부터 빼냈다. 이「정보원」은 첩자·도청장치, 또는 전파 감청 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바짝 긴장한 한국정부는 미국 측의 해명을 요구했다. 다음해인 77년8월 터너 CIA국장은『청와대를 상대로 녹음 또는 도청을 한 일이 없으며, 나는 이것을 중앙정보국과 국가안보회의, 기타 모든 미국정부기관을 대표하여 말한다』고 해명했다. 양국간 긴장은 일단 가라앉는 듯 보였으나 이번에는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윌리엄 포터가 아예 도청자체를 시인하고 나섰다.
『내가 한국에 부임하기에 앞서 도청이 중지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나는 그러한 도청을 재개해서는 안된다고 지시했다.』
67년부터 71년까지 주한 미 대사로 근무한 포터가 미국 CBS방송과의 회견(78년4월)에서 말한 대로라면 적어도 67년까지는 청와대도청이 자행됐다는 뜻이 된다. 외교적으로 이 문제는 미국 측이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도청사실이 없었음을 거듭 해명하면서 유감의 뜻을 표명함으로써 흐지부지 끝났다.
박 대통령과 한국국민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굴욕이 있을 수 없었다.
약소국의 설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태였다.
당시 우리 청와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포터 대사의 발언이 있자 관계당국에서는 각종 도청방법에 대한 방지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가장 유효한 도청방지대책으로서 각하 집무실의 외곽을 납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나왔다. 외국에서도 그 방법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의를 받은 대통령은「우방을 믿지 못한다면 어떡하느냐. 필요 없다」며 채택하지 않으셨다.(김정렴 당시 청와대비서실장)
비록 납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외곽처리하지는 않았지만 청와대 경호실은 나름의 대책을 세워 실행했다.

<중대회의 때 "가동〃>
당시 경호실 통신처장(준장)으로 청와대내의 통신시설·보안책임자였던 김영호씨(58·전금성정밀 부회장)의 회고다. 박 대통령께서는 도청설 때문에 매우 언짢아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외교적 조치와는 별도로 우리 통신팀에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우선 과연 도청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뮬레이션(모조)장치를 만들어 극비리에 온갖 실험을 해보았지요. 당시의 국내기술력을 총동원했으나 결론은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의 하나 경우를 위해서도 별도의 도청방지장치를 설치해야 했습니다.
기술측면에서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대통령집무실의 2중 유리창을 3중으로 만들고 그 사이의 공간에 음파발생장치를 설치했지요. 유리 사이에서 발생한 일종의 잡음이 외부에서의 감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석이었어요. 각하께서 집무실 벽의 스위치를 올리면 도청방지장치가 작동됐지요. 이 작업내용은 당시 나를 포함해 서너명 밖에 몰랐을 정도로 최대한 보안을 유지한 가운데 진행됐습니다.』
박 대통령은 측근이나 각료들과 중요한 내용을 의논할 때는 이 도청방지장치를 활용했다. 75년 말부터 5년간 외무부장관을 지낸 박동진씨(70·현 한국전력 이사장)의 증언.
『나를 집무실로 불러 외교현안에 대한 밀담을 나눌 때 박 대통령께서는 벽에 붙은 스위치를 꼭 올렸어요.
그러면 귀에 들릴 듯 말듯하게 웅-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스위치를 내렸고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이었지만 어떡합니까. 처음 그 장치를 했을 때는 각하도 익숙지 않았던지 어떤 날은 이야기 도중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원래 수줍음을 많이 타는 분이라 그럴 때는 아주 멋쩍어 하셨어요.』

<"사윗감 구해달라〃>
최근까지도 통일원장관과 주미대사를 역임하는 등 일선에서 활동중인 박 전장관은 박 대통령자녀의 혼담과 얽힌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외무장관 재직 때인데 하루는 대통령께서 은밀히 나를 불렀어요.「근혜(박 대통령의 장녀)신랑감을 물색중인데, 외무부의 젊은 사무관중에서 적임자를 골라보라」는 것이었지요. 고시출신 총각들을 조사해보았지만 솔직히 적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외무부안에 총각사무관이 수십명인데 대통령의 지시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고요. 생각 끝에 두 명을 골라 가문·학력등 신상명세와 함께 박 대통령께 보고했지요. 나 자신 그들이 최적임자라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요. 대통령은 그후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냥 넘어갔습니다. 또 한번은 둘째 따님(근영씨)의 경우인데, 내가 잘 아는 가문의 한분이 나에게 은근히 부탁을 해왔어요. 당시 근영양은 서울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 대학 법과 우등생인 청년이 내가 아는 가문의 자제였어요.
미팅에서 만났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근영양도 그 청년을 안다면서 나보고 박 대통령께 한번 청을 넣어보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지금은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중인 그 청년은 외가와 친가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법조계·의학계 인사들이어서 나도 응낙했지요. 대통령을 뵌 김에 그 청년 얘기를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나만 머쓱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박 대통령의 외국에 대한 자세에 대해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일부에서 그 분을「반미·친일」의 도식으로 이해하려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큰 오해』라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의 외교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은 국가이익을 외교의 제일로 삼고 국제신의를 존중하며 내정간섭을 일절 배척하는 자주외교라 하겠다…72년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자 우리 정부 내에서도 대만과 매년 개최하던 부 총리급 경제각료회담을 장관급으로 격하시키자는 의견이 강하게 일어났다.

<내정간섭 일절 배척>
그러나 박 대통령은 대만이 일제 때 우리 임시정부를 도와주고 해방 후 유엔에서도 줄곧 지원했던 관계를 들어「대만주재 대사관은 다른 나라보다 맨 마지막에 문을 닫을 생각이니 양국관계를 변동 없이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또 65년 한일회담타결에 즈음한 담화문에서 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과거만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부구대천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었다.』(『김정렴 회고록』)
『박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매우 자존심이 강한 민족주의자였다. 따라서 외세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면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런 바탕에서 박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 미국과 일본을 우리 나름으로 이용하려했다.』(이동원 전 외무장관)
이들 증언은 박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이들로부터 나온 만큼 일정 부분 삭감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대륙세(소련·중국·북한)와 해양세(미국·일본)가 맞물려 있던 그 시대에 박정희의 선택폭은 극히 제한돼 있었고, 그가 내린 결단은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들었다. 많은 사가들은 뒤늦게 해방 후 한국과 북한의 서로 다른 선택과 지금의 결과를 비교해 연구하고 있다. <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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