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이웃 언니 같아 빛나는 전도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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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아무래도 그녀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힘들 듯합니다. 제60회 칸영화제가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는 순간, 전도연은 금빛 감도는 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죠. 소화하기 어려운 옷이었음에도 그녀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빛내는 데 제격이었습니다. 나중에 듣자니 담당자들은 짧은 단발머리를 우아한 업스타일로 만드느라 꽤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영화제가 끝나고 인천공항에 내리면서 그녀는 지극히 편안한 차림새를 선보입니다. 금빛 링 귀고리를 했을 뿐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와 빨강.검정 체크무늬 셔츠였지요. 대기 중이던 국내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가 아니었다면, 지난밤 세계 영화제의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스타를 자칫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두 모습 중 어느 것이 전도연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 둘을 동시에 꼽고 싶습니다. 그녀는 영화 데뷔작 '접속'부터 스크린 밖에 있는 '평범녀' 눈높이 감성을 농밀하게 표현했습니다. '접속'에서 그녀의 PC통신 아이디를 기억하시는지요. 공주도, 여왕도 아니고 '여인2'였습니다.

전도연의 스펙트럼은 넓었습니다. 천진한 시골 소녀(내 마음의 풍금), 불륜에 빠진 아기 엄마(해피엔드), 화끈한 매력녀(피도 눈물도 없이), 정숙한 양반 과부(스캔들), 엄마와 딸의 1인2역(인어공주), 순애보에 눈물짓는 윤락녀(너는 내 운명)까지 어느 한 번도 만만하고,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만 하면 좋을 듯한 배역을 택한 적이 없었지요.

그러면서 그 다채로운 인물에 항상 친밀함을 담아낸 것이 이 배우의 놀라운 점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구중궁궐에 살다 잠시 테라스에 나와 손을 흔들어 주는 듯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와 같은 땅을 밟고 있는 인물이라는 공감을 늘 불러일으키곤 했지요.'여배우'라는 직업에 곧잘 더해지는 온갖 장식과 오해를 감안한다면 스크린 데뷔 10년째, 출연작 10편에 이르도록 이 같은 미덕을 꾸준히 발산하고 있는 점은 이 배우의 대단한 자산입니다.

칸 현지에서 수상 모습을 지켜본 그날 밤, 잠시 눈을 붙이려 누우니 '밀양'의 장면이 어른거렸습니다. 여주인공 신애가 좁은 부엌에 서서 밥을 먹는 모습입니다. 아들을 잃는 가혹한 비극을 겪은 뒤 신앙의 힘으로 구원을 받은 양 밖에서는 생글거리던 그녀가 나 홀로 목이 메듯 밥을 꾹꾹 삼키는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하던지요. 기도문을 외는 것으로 잠시 속을 가라앉히다가, 화장실에 일보러 들른 동네 꼬마를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게 아닐까 싶어 찾던 모습이 어찌나 황망하던지요.

아마도 날 때부터 성녀나 천사처럼 보였던 배우라면 느끼지 못했을 울컥함이 치밀어올랐습니다. 그런 연기로 받은 상이라 더욱 박수를 보내고 싶군요. '월드스타'라는 들뜬 호칭이 새로 쏟아지고 있어도, 이 배우가 좀처럼 허튼 바람이 들 것 같지 않다는 믿음도 이 때문입니다. 이 배우를, 좋은 한국 영화에서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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