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범람하는 사설정보지 '찌라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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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05면

“김 회장이 8일 밤 경호원 등을 대동하고 북창동의 한 술집에 나타났다고 함. 둘째 아들인 ○○씨가 최근 강남에서 시비가 붙어 이 술집 종업원에게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날 한화 일행은 문제의 종업원을 찾아내 손을 봐줬고, 그 과정에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정보 선점 욕구에 고위직일수록 더 찾는다 #단속 잦아도 끈질긴 생명력 … 한화 보복폭행 사건 들통의 도화선

지난 3월 13일 서울 용산의 정보업체 H리서치가 펴낸 정보지 ‘종합경영보고서’에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담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뒤 불과 4일 만이었다. 이 내용은 여러 정보지로 전파됐고, 한달 보름이 지난 4월 24일 제도권 언론에 의해 사실로 확인 보도됐다.

지난달 14일 경찰은 H리서치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정보지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압수수색을 당한 동 업체는 3월 8일 밤에서 9일 새벽 발생한 김 회장 보복폭행 사건을 4일 뒤 정보지에 실었는데, 이는 동 업체의 사장이 ○○○출신이어서 남들보다 빨리 알 수 있었다고 함.”

지난달 정보지에는 금융감독원의 AㆍB 부원장보가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두 부원장보는 그때부터 “재산이 많다던데 사실이냐”는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공직자로서 이미 전 재산이 공개된 상황이다. 진짜 재산이 많다면 억울하지 않겠다. 일일이 대꾸할 수도 없고 답답할 따름”이라고 두 사람은 하소연했다.
두 사례는 정보지의 실태를 짐작하게 한다. 정보지 예찬론자들은 “50%는 맞다”고 주장한다. 간혹 특종성 첩보도 눈에 띈다. 이런 첩보는 언론사처럼 치밀하고 어려운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게재된다. 무책임한 범죄행위일지 모르나 반만 맞더라도 빨리 아는 것이 낫다는 게 예찬론자들의 생각이다.

제도권 언론이 위축되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부나 기업의 견제를 세게 받고 있는 언론이 보도를 제대로 하겠느냐고 불신한 나머지 정보 욕구를 채워줄 다른 수단을 찾는다는 것이다.

◆소수만 먼저 안다는 것=정보지의 관심 분야는 권력 서열 순과 일치한다. 정보지에 열광하는 이들도 정치ㆍ경제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정보지에 청와대 등 정치권의 움직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선거철에는 정치권 정보가 급증한다. 행정부 고위 관리의 움직임 역시 초미의 관심사다. 정보지를 구독하는 기업과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의 동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의 언행도 단골메뉴다. 연예인과 재벌2세, 연예인 간 연애담이나 스캔들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식사나 골프 회동 때 세상 물정에 밝다는 것을 과시하는 재료로 쓰인다.

정보지는 남들이 모르는 얘기를 하면서 ‘아는 척’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교묘히 파고든다.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된다. ‘비밀스러운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을 믿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서다.

정보지가 다루는 영역에는 제한이 없다.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소송에 휘말릴 수 밖에 없는 내용이 가득하다. 고위 관료나 정치권 인사, 연예인 등의 사생활과 발언 등이 오르내린다. 때론 일반 기업 직원의 섹스스캔들까지 재료가 된다. 지난주 정보지에 실린 내용이다. “XX생명 모 부서 새내기 직원이 회사 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내사한 결과 같은 팀 여팀장과 데이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짐. 이 여자 팀장이 회사 내에서 새내기 직원 말고도 본부장과 부사장까지 두루두루 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알려짐.” 이런 정보는 ‘XX는 멀쩡한 회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기강이 엉망이야’라는 소문의 온상이 된다.

이런 정보지의 속성을 역이용하는 예도 있다. 특정 정치인을 음해해 매장하거나 자금경색설을 퍼뜨려 기업의 생명줄을 위협하는 더러운 무기로 활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악성루머 유포와 구전의 위력은 인터넷과 결합해 배가된다. 정보지 피해자들은 유령 같은 정보지 제작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때 절망하게 마련이다.

◆종합상사 모임이 효시=정보지는 1970년 후반 국내 종합상사 기획부나 기획팀 관계자들이 일본종합상사들을 흉내 내 비공식모임을 갖고 실적자료를 교환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찌라시’라는 일본말이 쓰이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은 국내외 무역 환경이나 경기흐름을 짚다 보면 정치권이나 재벌 동향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보지는 1980년대의 극심한 언론 통제 상황 아래서 제대로 틀을 갖춰 나갔다.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자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는 내용을 은밀히 전파하는 ‘지하언론’ 구실을 했던 것이다.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권력층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88서울올림픽 전에 주식시장이 대호황을 누리면서 ‘정보=돈’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때부터 여의도 증권가가 정보지의 주 수요처 및 유통경로가 됐다.

기업들은 90년대 김영삼 정부 들어 새로운 권력층에 줄을 댈 필요가 있었다. 권력층이 바뀔 때마다 기업들은 새로운 접점을 구하기 위해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 언론 자유 등 주변 환경이 급변하면서 정보지의 존립기반이 좁아지자 연예가 스캔들 등 흥밋거리의 비중이 높아졌다.

최근의 정보지는 보통 A4용지 10~20쪽 분량으로 발간된다. 정보모임에서 교환된 정보가 대부분이다. 국가 사법기관 및 정보기관 관계자, 국회의 보좌관 및 비서관, 정부산하기관의 정보업무 담당자들, 민간 대기업의 정보담당자들이 참석한다. H리서치 같은 정보지 생산 업체들은 여러 정보교환팀에서 수집한 것을 정리ㆍ편집해 판다. H리서치는 회원가입비 100만원과 월 30만원을 받고 주 5회 e-메일로 정보를 제공해왔다.
80년대 초부터 정보 담당 업무를 해온 B그룹 임원은 “최고경영자나 정보담당자가 독자적인 정보 수집ㆍ분석 역량을 갖추지 않고 찌라시 수준의 정보에 탐닉한다면 정보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모 금융그룹 정보담당자는 “현대 사회에서 정보지는 그 수요처가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달고 살아야 할 암덩어리와도 같다”며 “그러나 개인과 기업의 명예와 존립에 치명타를 가하는 오류ㆍ왜곡 정보의 유포에 대해선 수사당국이 끝까지 추적해 엄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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