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문제 진보적시각서 묘사 | 『들』윤정모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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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가을로 들어선 독서·출판계는 우울하다. 책다운 책, 작품다운 작품은 안 읽히고 쓰잘데 없는 쭉정이 같은 것만 팔리고있다. 이런 현상은 문학 쪽에서 더욱 심각하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마지막이라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등 책제목만 보아도 싸구려 감상 냄새가 물씬 나는 익명·무명시인들의 시집이 베스트셀러 시집 수위에 올라있고 소설 쪽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여서 『소설토정비결』『소설목민심서』『소설 』등 야담성 에피소드에만 무게중심을 둔 이름 없는 작가들의 역사인물소설이 올라있다.
이러한 독서풍토에서 가장당혹하고 있는 쪽은 사실주의문학 진영. 건강한 비판정신, 진보적 의식으로 80년대 못돼도 수만, 잘되면 수십만 부 씩 팔리며 독서계를 이끌었던 사실주의 문학작품은 이제 초판 수천 부도 안 팔려 그쪽 작가들로 하여금 평생 바쳤고 바쳐야할 소설 작업 자체에까지 회의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우울한 출판·독서풍토에서 윤정모씨(46)의 장편『들』(창작과비평사 간)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 본격문학에 한 가닥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90년 겨울호부터 92년 여름호까지 계간 『창작과 비평』에 연재된 후 지난달15일 상·하 두 권으로 출간된 뜰』은 발간한달 남짓인 현재 10만 부 가량 팔려나갔다.
68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재학시절부터 의욕적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윤씨는 81년『여성중앙』에 중편『바람벽의 딸들』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들어섰다.『여대생작가·통속작가 시절을 마감하고 본격 문학시대를 열어준 결정적 계기는 80년 광주항쟁이었다』고 말하듯 윤씨는 80년대 들어『밤길』『고삐』『빛』등을 발표하며 분단·반미·여성문제 등을 진보적 시각에서 물고 늘어졌다.
『들』도 윤씨의 이러한 진보적 소설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경기도 도실 이라는 농촌을 무대로 한 『들』은 농민들의 오늘의 삶과 농촌문제를 다룬 진보적 농촌소설이다.
어쩔 수 없이 공단으로 흘러가 노동운동을 하다 수배돼 고초를 겪고 다시 고향 농촌으로 돌아온 젊은이가 지역농민, 나아가 전체 농민과 함께 벌이는 농민운동이 작품의 축을 이룬다.
수세·수매·소 파동·소작문제 등 농촌의 산적한 현재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그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해 6·25, 일제하까지 파고든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회상형식을 빌려 수시로 작품 속에 끼어 드는 작가의 이념적·운동적 관점이 그런 유의 소설에 식상한 독자들의 짜증을 돋울 만큼 이 작품은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들』은 잘 읽히고 있다.
83년 윤씨는 농촌소설을 써보겠다며 경기도용인의 한 농촌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사도 짓고 농민과 어울리며 윤씨는 이 작품을 썼다. 때문에『들』에는 오늘의 구체적 농촌의 삶이 들어있다.
특히 농촌의 구체적 정서가 들어있다. 윤씨가 함께 부대끼며 잡아낸 오늘의 농촌정서는 그러나 우리가 떠나온, 향수로 간직하고 있는 그 정서와 다름이 없다. 윤씨는 투박하면서도 풍부한 농민들의 언어, 판소리, 혹은 신소설 같은 조선 식 문체, 그리고 산과 들 등의 자연과 마을과 사람 등 인간세상을 함께 묶는 소설의 전체 구성 등으로 하여 분리되지 않은 삶의 원형으로서의 농촌을 들려주며 읽을 맛을 나게 하고있다. 이러한 구체적이면서도 총체성을 띤 농촌정서가 작가의 진보적 시각을 감싸며, 아니 그 메시지를 살리고 있는 게 장편 『들』이다.
따라서 『들』은 90년대 들어 허탈감에 빠진 진보적 문학진영의 활로를 위해 문체나 어휘·구성 등 소설 미학적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 같다.<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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