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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투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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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인터넷 '네이버'에서 김 선수의 프로필을 검색하면 소속이 '신세계'로 나온다. 틀린 프로필이다. 그동안 우승 경력이 없던 김 선수는 올해 신세계와의 스폰서 계약을 갱신하지 못했다. 스폰서 없는 선수는 금전적인 어려움과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린다. 더구나 기존 스폰서와 재계약에 실패하면 패배감과 박탈감이 더하고 동료 선수들의 시선마저 부담스럽다고 한다.

벌써 우승했어야 할 김영 선수가 스폰서 없는 선수가 되어 첫 우승을 해낸 점은 얄궂다. 이럴 때 언론은 '헝그리 투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 "배가 고파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놀라울 만큼 많은 스포츠팬이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헝그리 투혼은 '부상 투혼'과 함께 자주 사용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다.

우리 스포츠와 언론은 헝그리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흘러간 세대의 우리 스포츠가 배고팠고, 반드시 성공해 배고픔을 면하겠다는 갈망으로 갑절의 힘을 냈던 기억 때문이리라. 가난한 시대에 우리의 스포츠 영웅들은 하나같이 배가 고팠다. 첫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 고 김기수씨, 레슬링 세계선수권자인 장창선 전 태릉선수촌장은 모두 맨주먹으로 일어선 헝그리 스타들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금메달을 따낸 우리 선수들은 시상대에서 좀처럼 울지 않는다. 박태환과 김연아는 밝고 당당하다. 이제 우리 스포츠는 헝그리 투혼에 관한 한 졸업장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아직도 성공을 꿈꾸며 땀과 눈물을 쏟는 도전자들이 있다. 그들의 땀과 눈물 자체에 박수를 보낼 수는 없는가.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헝그리로 가리고 싶지 않다.

대신 헝그리 정신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 배고픔에 대한 저항에서 승리에 대한 열망으로. 영원한 배고픔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까지 집어삼키고 만 그리스 신화 속의 에리직톤처럼 끝없이 승리와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 그런 헝그리 투혼을 보고 싶다. 우리는 업그레이드된 헝그리 투혼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히딩크의 말에 우리는 얼마나 감동했던가.

미국남자프로골프(PGA) 투어의 타이거 우즈는 두 번 출전하면 한 번꼴로 우승하는 최강의 골퍼다. '골프다이제스트'에 따르면 우즈는 지난해 상금만 1194만 달러, 광고료와 스폰서료, 대회 초청비 등으로 8700만 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그의 열망은 아무리 많은 트로피나 돈다발 앞에서도 변함없이 뜨겁다. 우즈는 그렇게 헝그리한, 승리가 고픈 선수다.

김영 선수는 지금도 가난한 골퍼는 아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외모와 골프 실력을 겸비한 김 선수는 곧 좋은 스폰서를 만날 것이다. 올해 스물일곱 살인 그녀는 더 많은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다. 김 선수가 엄청난 부자 선수가 된 뒤에도 끝없이 승리에의 열망을 간직한 골퍼가 되기를, 그런 헝그리 투혼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이 바람은 비단 김 선수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허진석 중앙SUNDAY 스포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