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290호 대구 계산성당/「순교의 상징」 새 단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고딕건축 양식 원형 복원/유물·성광 등 전시… 새 성지로 각광
중세기의 독특한 가톨릭 건축양식과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해온 대구시 계산동2가 71 사적 제290호 계산성당이 1년2개월 동안의 보수공사 끝에 건물원형을 복원,다시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본당인 이 성당은 한국가톨릭 2백년사에 족적을 남긴 순교의 상징물로 연건평 3백평 규모의 단층건물.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대구에 가톨릭 본당이 설정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프랑스인 로베르(한국명 김보록)신부가 1900년 3월 프랑스·중국·홍콩 등지에서 건축전문가를 비롯해 도목수·석공·벽돌공 등 30여명을 초빙,착공 2년만에 건립한 영남지역 최초의 고딕양식 건물이란 점에서 보존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로베르신부는 당초 이 성당 건립 전인 1899년 이곳에 그릭크로스형 평면에 팔각 기와지붕을 이은 45칸 규모의 조선조 건축양식에 따른 목조 성모당과 성당·사제관 등을 건립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0년 2월 화재로 전소되자 서울 명동성당의 설계도면을 본떠 화재위험이 없는 웅장한 서구식 건축양식을 도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스테인드글라스·대리석·창호철물 등 고급 건축자재는 모두 프랑스·홍콩에서 들여오고 벽돌은 가마를 설치해 중국인 벽돌공들이 직접 구워내는 등 구석구석까지 조형미와 예술성을 살리려한 흔적을 남겼다.
1902년 5월 마침내 두개의 팔각형 종탑이 우뚝 서고 동서로 배치된 아치형의 천장과 회랑이 웅장하게 조화를 이룬 중세기 성당의 전형적인 고딕식 벽돌조 건물이 준공되고 이후 1918년까지 16년동안에 걸쳐 주교설교단·제단을 설치하는 등 성당 내부공사와 함께 종탑을 1차 준공당시보다 두배로 높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외벽은 붉은 벽돌·회색 벽돌을 혼합해 쌓았으며,특히 회색벽돌은 벽면처리와 내부회랑,처마와 천장의 뼈대부분·창틀에 집중적으로 사용해 견고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세기 가까이 지나면서 퇴락하기 시작,외벽의 벽돌과 문틀이 부식되고 마루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성당측은 원형보존에 역점을 두고 서둘러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옛 벽돌을 재현하기 어려워 마침 시 외곽으로 이전하는 대구대교구 산하 대건중·고교 부속건물에서 헐어낸 벽돌 1만5천장을 가려내 1백50t의 점토를 섞어 사용하는 한편 진흙·모래·횟가루 등 이른바 삼화토 공법으로 고딕양식의 원형을 살렸다.
이 공사를 진두지휘 해온 계산성당 사무장 최국공씨(49)는 『단순한 성당 보수공사가 아닌 문화재 보존과 한국가톨릭 요람을 꽃피운 선현들의 유업을 전승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원형 복원에 역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또 계산성당에서 동남쪽 6백여m쯤 떨어진 관덕정순교 기념관에는 을해(1814)·정해(1827)·기해(1839)·병인(1866) 박해 등 초기 한국가톨릭 4대 박해때 가톨릭 신자들의 은식처였던 한티고개와 신나무골 등 교우촌에서 끌려와 처형된 순교자들의 각종 유물 31점,성체현시조배에 쓰이는 성광 등 65점이 전시돼 있어 전국의 성직자·수도자·평신도들이 하루 평균 1백여명씩 찾아드는 등 이들 두곳이 새로운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대구=홍권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