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년 씨족마을 "마지막 추석"|청도운문댐 년말 담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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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바닥이 물 속에 잠긴다 카이 기가 막혀서 한숨밖에 안나오능 기라. 마지막으로 조상들께 추석차례나 올리고 가을걷이도 할겸 버티고 있지만 이미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났다 카드마.』
경북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 김상문씨(57)는 전통 씨족사회의 6백년 역사가 물 속에 잠겨야만 하는 사실이 안타까워 폐허처럼 변해버린 고향 땅에서 마지막 추석을 앞두고 실향의 설움에 목이 멘다.
대구시 광역 상수도사업으로 85년 총 사업비 7백50억원을 들여 착공된 운문댐(저수용량 1억2천6백75만t) 이 착공 7년만인 오는 연말부터 담수를 시작함에 따라 본댐과 인접한 순지리 마을이 맨 먼저 수몰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수몰지구는 운문면 12개마을 중 이곳 순지리를 비롯해 방음·대천·서지·오진·공암·지촌리등 7개 마을로 주민은 모두 6백가구 3천여명.
이 가운데 절반이상 주민들이 이미 대도시로 이주했고 현재 2백80여 가구만 남아있으나 이들도 모두 추석을 세고 나면 곧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특히 절박한 수몰위기에 놓인 순지리마을은 여느 마을과는 달리 대부분의 주민들이 추석은 고사하고 가을걷이 마저 포기한 채 문전옥답과 가옥을 남겨두고 쫓겨나 듯 보상금만 챙겨 이주했다.
그러나 김씨네 일가족 5명만은 떠날 마음이 내키지 않아 당국의 이주독촉에도 아랑곳없이 을씨년 스럽기만한 폐허의 한모퉁이를 지키며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한 추석을 맞고 있다.
이웃 방음리 주민 송문학씨(61)도 사정은 마찬가지.
장성한 3남매를 먼저 대구로 이주시키고 부인 이련옥씨(58)와 함께 있는 송씨는『추석을 앞두고 빨리 떠나라는 독촉장만 날아와 억장이 무너진다』며 당국의 끊임없는 철거령을 야속해했다.
지난달 초순엔 재경·재부·재구 향우회 등 1백여명의 출향인들이 찾아와『내년부터 해마다 추석명절을 전후해 댐 근처에서 모임을 갖고 망향제를 올리자』고 결의해 한껏 즐거워야 할 고향방문이 그렇게도 숙연해질 수가 없었던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물에 잠기기전의 고향모습을 봐두기 위해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이 예년의 3백여명보다 4배나 많은 1천2백여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수몰예정지역 곳곳에선 쓸쓸하고 허전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말 남보다 먼저 경기도안양으로 이주했다가 성묘를 위해 다시 고향을 찾은 박현우씨(51)는『정든 고향을 다시 찾았으나 반겨주는 이도 잠 잘 곳도 사라져버려 차라리 안온 것만 못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당국에서는 수몰주민들을 위해 이곳 순지리에서 서남쪽으로 5km쯤 떨어진 방지리에 새로운 이주단지를 조성, 면사무소·지서·우체국·농협 등 공공기관이 들어설 예정이고 1백80채의 주택단지도 현재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귀성객들은 저마다『예전의 향토내음 물씬 풍기던 정취는 간곳 없고 그저 생소한 취락지로만 느껴진다』며 고향의 수몰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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