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970억 차익" 법원은 89억만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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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의 쟁점은 CB 발행가격의 적정성 여부와 삼성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는지다. 재판부는 "CB가 당시 에버랜드 주식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발행됐고, 그만큼 회사가 손해를 봤다"고 설명했다. 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씨에게 CB를 넘겨줘 회사의 지배권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태학.박노빈씨 등 전.현직 사장들의 배임 혐의가 인정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CB 발행 과정에 삼성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다"는 검찰과 고발인들의 주장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았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위법한 행위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금액에 대해 검찰이 기소한 액수(969억원)의 10분의 1도 안 되는 89억여원만 인정했다. 변호인 측은 "검찰의 수사가 부풀려졌다"고 지적했다.

◆ 기소 내용 중 10분의 1만 인정=재판부는 허씨 등 두 피고인이 CB를 시세보다 낮게 발행해 이 회장의 네 자녀가 전체 지분의 62%(120여만 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CB를 발행할 당시 가격을 주당 7700원으로 산정한 것은 시가에 비해 낮다는 것이다. 실제 거래가를 기준으로 할 때 당시 에버랜드 1주당 가격은 1만4825~10만원, 장부가액 기준으로 1만4825~23만4895원에 달한 것으로 평가했다. 재판부는 이에 근거해 적정주가를 최소 1만4825원으로 봤다. CB를 발행하기 1년 전인 1995년 말 삼성물산이 삼성건설을 합병하면서 에버랜드 주식을 인수했을 때 가격이다. 이를 적정주가로 보면 이재용씨 등은 약 187억원 상당의 주식을 96억여원(주당 7700원)에 인수해 차액인 89억여원의 이익을 봤다는 것이다. 대신 그만큼 회사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1심 재판부는 CB를 싼 값에 발행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적정 주가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들의 배임 행위에 따른 피해 금액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변호인 측은 "당시 회계법인은 9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한 주당 가치를 5446원으로 평가했고, 영업실적치에 근거해서도 1만413원으로 책정했다"며 "따라서 7700원은 적정한 가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국내의 모든 기업이 CB 전환 가격을 주식의 액면가로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덧붙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의 산정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재판부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배임금액은 검찰 공소사실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깎였다. 항소심에서 두 피고인의 형량이 높아진 것은 5억원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 특정경제범죄처벌법상 배임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 공모 여부는 판단 안 해=검찰은 허씨 등을 기소하면서 "피고인들의 범행은 미리 주주들과 공모해야 성립하는 범죄"라고 주장했다. 전문 경영인인 피고인들이 회사의 지배권이 바뀌는 중대한 문제를 그룹의 '윗선'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했을 리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에 대해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검찰이 공모 혐의를 공소사실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기존 주주의 공모 여부는 이 사건 범죄 성립과 관계없다는 게 이유였다.

재판부는 3월 재판에서 "공모 여부에 대해 공소장을 좀 더 명확히 기재할 필요가 없느냐"며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검찰은 "기존 공소장에 그런 내용이 포함돼 있고 어차피 법률상 판단할 문제"라며 변경을 하지 않았다. 피고인 측 변호인인 신필종 변호사는 "검찰은 그룹 차원의 공모 혐의를 주장해 왔지만 10년 동안 조사해 나온 게 있느냐"며 "항소심 판결은 공모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대법원에서 다시 다툴 듯=변호인 측은 "대법원에서 하나하나 법리적으로 다투겠다"며 상고할 뜻을 밝혔다. 변호인 측은 우선 CB를 저가로 발행했다는 항소심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시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가 아니고 수년간 적자를 보는 등 실적이 나빴기 때문에 CB 발행 가격은 적정하다는 것이다.

또 설사 CB 발행 가격이 낮더라도 발행 주식 수가 달라질 뿐 회사에 들어오는 돈(CB 발행 총액)은 같기 때문에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발행가가 낮으면 주주가 손해를 보는 것이지 회사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 검찰은 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 수사와 관련, "항소심 판결문을 검토한 뒤 절차에 따라 신중히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에버랜드 CB 저가 발행 사건의 유무죄 여부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정철근.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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