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의 쟁점은 CB 발행가격의 적정성 여부와 삼성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는지다. 재판부는 "CB가 당시 에버랜드 주식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발행됐고, 그만큼 회사가 손해를 봤다"고 설명했다. 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씨에게 CB를 넘겨줘 회사의 지배권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태학.박노빈씨 등 전.현직 사장들의 배임 혐의가 인정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CB 발행 과정에 삼성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다"는 검찰과 고발인들의 주장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았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위법한 행위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금액에 대해 검찰이 기소한 액수(969억원)의 10분의 1도 안 되는 89억여원만 인정했다. 변호인 측은 "검찰의 수사가 부풀려졌다"고 지적했다.
◆ 기소 내용 중 10분의 1만 인정=재판부는 허씨 등 두 피고인이 CB를 시세보다 낮게 발행해 이 회장의 네 자녀가 전체 지분의 62%(120여만 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CB를 발행할 당시 가격을 주당 7700원으로 산정한 것은 시가에 비해 낮다는 것이다. 실제 거래가를 기준으로 할 때 당시 에버랜드 1주당 가격은 1만4825~10만원, 장부가액 기준으로 1만4825~23만4895원에 달한 것으로 평가했다. 재판부는 이에 근거해 적정주가를 최소 1만4825원으로 봤다. CB를 발행하기 1년 전인 1995년 말 삼성물산이 삼성건설을 합병하면서 에버랜드 주식을 인수했을 때 가격이다. 이를 적정주가로 보면 이재용씨 등은 약 187억원 상당의 주식을 96억여원(주당 7700원)에 인수해 차액인 89억여원의 이익을 봤다는 것이다. 대신 그만큼 회사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1심 재판부는 CB를 싼 값에 발행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적정 주가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들의 배임 행위에 따른 피해 금액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변호인 측은 "당시 회계법인은 9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한 주당 가치를 5446원으로 평가했고, 영업실적치에 근거해서도 1만413원으로 책정했다"며 "따라서 7700원은 적정한 가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국내의 모든 기업이 CB 전환 가격을 주식의 액면가로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덧붙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의 산정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재판부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배임금액은 검찰 공소사실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깎였다. 항소심에서 두 피고인의 형량이 높아진 것은 5억원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 특정경제범죄처벌법상 배임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 공모 여부는 판단 안 해=검찰은 허씨 등을 기소하면서 "피고인들의 범행은 미리 주주들과 공모해야 성립하는 범죄"라고 주장했다. 전문 경영인인 피고인들이 회사의 지배권이 바뀌는 중대한 문제를 그룹의 '윗선'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했을 리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에 대해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검찰이 공모 혐의를 공소사실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기존 주주의 공모 여부는 이 사건 범죄 성립과 관계없다는 게 이유였다.
재판부는 3월 재판에서 "공모 여부에 대해 공소장을 좀 더 명확히 기재할 필요가 없느냐"며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검찰은 "기존 공소장에 그런 내용이 포함돼 있고 어차피 법률상 판단할 문제"라며 변경을 하지 않았다. 피고인 측 변호인인 신필종 변호사는 "검찰은 그룹 차원의 공모 혐의를 주장해 왔지만 10년 동안 조사해 나온 게 있느냐"며 "항소심 판결은 공모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대법원에서 다시 다툴 듯=변호인 측은 "대법원에서 하나하나 법리적으로 다투겠다"며 상고할 뜻을 밝혔다. 변호인 측은 우선 CB를 저가로 발행했다는 항소심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시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가 아니고 수년간 적자를 보는 등 실적이 나빴기 때문에 CB 발행 가격은 적정하다는 것이다.
또 설사 CB 발행 가격이 낮더라도 발행 주식 수가 달라질 뿐 회사에 들어오는 돈(CB 발행 총액)은 같기 때문에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발행가가 낮으면 주주가 손해를 보는 것이지 회사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 검찰은 그룹 차원의 공모 여부 수사와 관련, "항소심 판결문을 검토한 뒤 절차에 따라 신중히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에버랜드 CB 저가 발행 사건의 유무죄 여부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정철근.정효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