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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김우중 회장 격려로 재기「김대중 납치」아버님도 후에 알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반면 80년으로 해가 바뀌어 전두환 장군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박지만 생도는 전형적인 염량세태의 쓴맛을 보게된다. 그의 계속되는 회고.『예년에 나는 4학년이었습니다. 하루는 생도전원이 교내 을지 강당에 집합했어요. 생도 대장님의 훈시가 있기 때문이었죠. 그즈음 새로 오신 생도 대장 님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야당의 전국구의원(장준익)이 된 분입니다. 훈시내용이 저한테는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각하야말로 우리의 진짜 선배님이시다. 그 이전(11기 이전)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는 식의 발언에서 나중에는 아버님과 전 대통령의 체구까지 비교하면서 유치한 방식으로 아버님을 깎아 내리더군요.

<5공 때 청와대초청>
「박대통령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볼품없고 촌스러웠는가. 조그만 키에 검은 안경까지 쓰고 다녔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님이신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손 흔드는 모습 하나만 보아도 위풍당당하시다」는 말도 있었어요.
나는 두 귀가 멍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아 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바뀌는가. 저 분이 진짜 본심으로 하는 말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당시 나뿐 아니라 다른 생도들도 그 훈시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정치바람과 인간의 변신에 대해서랄까. 그날 훈시가 끝나고 강당을 나오는데 몇몇 동기생들이 내 곁을 지나면서「야, 저럴 수 있는 거냐」고 위로 겸 한마디씩 해 주더군요.』
후일 박지만씨는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차례 5공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박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특별히 기억할 일이 없다』며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다.
81년4월 육군소위로 임관한 박씨의 군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결국 86년3월 대위로 예편했다. 이 후 수년간의 흐트러진 생활이 이어졌다.
89년 마약법위반혐의로 자수,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던 그는 지난해 3윌 향 정신성의약품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수모를 자초했다. 그리고 5개월여만인 8월31일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출감했다.
이 같은 일련의 파행에 대해 그는『어차피 내가 저지른 잘못인데 말을 덧붙여 보아야 구차한 변명만 될 뿐』이라며『부모님 생전에 그 뜻을 거스른 적이 많았는데 돌아가신 뒤에도 유지와는 정반대로 엇나갔기에 면목없다』고 말했다.
『이 불명예를 그대로 안고 죽는다면 부모님을 어떻게 뵐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창피한 것이 문제 아닙니다. 아마 아버님은 나를 보면 틀림없이 돌아앉으실 겁니다. 앞으로라도 열심히 살아야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지요. 내 인생을 내가 열심히 살 겁니다.』
그는 『사춘기 때부터 왜 그랬는지 부모님이 하지 말하는 일은 기를 쓰고 더 했다. 부질없는 반항이었다』고 회고했다.

<5개월 감호소 생활>
그러나 회사 일로 화제가 돌자 박씨는 다소 신을 냈다.
『올해부터는 흑자를 내게 됩니다. 4억 원 흑자예정이지요. 내년에는 매출을 45억원으로 늘리고 6억원 흑자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사실 올 여름에 마음 독하게 먹고 저와 부사장의사무실에는 선풍기도 놓지 않았어요. 삼양산업을 종업원에게 제일 잘해주는 회사로 만들 작정입니다. 또 부모님의 유지와 근래 저를 도와 주신 분들을 생각해 경영상태가 좋아져 여유자금이 생기더라도 부동산같이 엉뚱한 곳에는 절대 투자하지 말아야겠지요.』
박씨에 대해 박태준 포항제철회장(민자당 최고위원)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두 분의 격려 덕분에 데 진로를 잡아나갈 수 있었어요.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군에서 제대할 무렵 김 회장님이「2년 가량 내 비서로 있으면서 경영수업을 해봐라. 그후 독립하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내 자세도 되어 있지 않았고…. 그후 89년 박 회장님이 포철의 방계 회사 격인 삼양산업의 부사장으로 입사하도록 힘써 주었고, 그 과정에서 김 회장님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박씨는『최근 뒤늦게나마 아버님이 하신 일을 제대로 알기 위해 김정렴 전 비서실장님의 회고록 같은 관련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박씨는「박정희 시대」의 권력의 이면을 체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김대중씨 납치사건 때 아버님이 처음에는 공산당의 술책이 아닌가 의심하다가 며칠 후 식사도중「과잉 충성하는 자들 때문에」라며 매우 불쾌해 하신 것으로 보아 아버님이 지시한일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게됐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그에게는 10·26이후의 경험들이 오히려 정치권력의 생리를 산 교훈으로 체득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지난8월15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동작동 국립묘지에서는 육영수여사의 18주기추도식이 열렸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김룡태 전 공화당원내총무·서영희 전 의원 등이 추도사를 한 뒤 유족을 대표해 연단에 나선 박씨는 울먹이며 간략한 인사말을 했다.

<3공 회고록 탐독>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아주신 내빈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조화를 보내 주신 노태우 대통령 각하 내외분과 추도사를 해 주신 어른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박대통령의 차녀 근영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육영재단이 주관한 이날 추도식에 장녀 근혜씨(전 육영재단이사장)는 불참했다. 일부 참석인사들 사이에는 두 자매간의 다툼 때문이라는 설까지 나돌았다. 이 때문인지 추도식후 박지만씨는 여러 내빈들로부터『앞으로 네 책임이 막중하다』는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박씨 본인은『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회사운영』이라고 했다.
그는 9월1일부터 연 사흘간 거래처들에 추석선물을 돌리느라 서울과 지방을 뛰어다녔다. 『장사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푸념하면서.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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