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요격미사일은 쏴 보지도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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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 표적인 ICBM이 요격에 필요한 고도에 도달하지 못한 채 태평양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바람에 요격 미사일을 발사할 수 없었다. 목표물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헨리 오버링 미국 미사일방어청장(공군 중장)은 이날 "목표물이 충분한 고도에 오르지 못해 MD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표적 미사일의 추락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요격할 지점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태평양 쪽으로 160㎞ 정도 떨어진 160~320㎞ 상공이었다. 오버링 청장은 "요격 실험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요격 미사일을 아예 발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현재 표적 미사일의 오작동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표적 미사일로 쓰고 있는 것은 구형 ICBM인 미니트맨에서 탄두를 제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워낙 낡아 오작동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현재 표적 미사일 개선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름 이후 다시 실험에 착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사전문가들은 "MD 실험은 표적 미사일의 발사도 포함하는 것이어서 실패는 실패"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난해 9월 1일 첫 장거리 미사일 요격실험을 했다. 7월 5일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고 약 두 달 만이었다. 미 국방부는 당시 1차 실험을 마친 뒤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실험은 무산됐다. 2차 실험은 1차 실험과 거의 같은 상황에서 표적 미사일의 성능만 강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능을 강화했다는 표적 미사일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따라 장거리 미사일 방어시스템의 성능을 과시하려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로이터 통신은 "북한과 이란 등에서 핵이나 화학탄두가 탑재된 ICBM이 미국을 향해 날아올 경우 그걸 격추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MD 강화 방침이 이번 실험의 좌절로 타격을 입게 됐다"고 보도했다.

◆ 동유럽 MD 배치도 차질 우려=그럼에도 부시 행정부는 북한 등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알래스카 포트 그릴리에 요격 미사일 발사기지를 한 곳 더 건설한다는 방침이다. 포트 그릴리에는 2개의 요격 미사일 발사기지가 있으며, 모두 13기의 요격 미사일이 배치돼 있다. 미 국방부는 연말까지 이곳의 요격 미사일을 21기로 늘리고, 내년 말까지는 포트 그릴리와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기지에 모두 30기의 요격 미사일을 배치할 계획이다. 반덴버그 기지엔 현재 2기의 요격 미사일이 있다.

미 국방부는 MD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앞으로 6년간 5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일본.호주와는 MD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란의 미사일이 유럽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폴란드에 10기의 요격 미사일을 배치하고, 체코에는 적의 미사일을 추적하는 레이더 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장악한 미 의회는 부시 대통령의 MD 계획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있다. 하원 군사위의 전략군 소위원회 위원장인 앨런 타우셔 의원은 23일 "1980년대부터 MD에 수백억 달러를 투입했는데도 아직도 시스템이 불안정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실험 무산으로 의회에선 MD 예산 삭감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원은 이미 17일 국방부가 요청한 내년도 MD 예산 89억 달러를 10분의 1도 안 되는 7억6400만 달러로 대폭 깎았다. 상원 군사위도 24일 폴란드와 체코의 MD 관련 예산을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소속 칼 레빈 상원 군사위원장은 최근 "동유럽 MD를 위한 협상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도 행정부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한다"며 "폴란드에 배치한다는 요격 미사일은 아직 개발도 안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부시 대통령은 다음달 초 유럽의 MD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코를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체코 국민의 3분의 2는 미국의 MD 체제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26일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는 미국의 MD 계획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폴란드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유럽의 MD가 이란뿐 아니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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