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인연'을 접은 금아 피천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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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겠지만…."

금아 피천득이 살아생전 남긴 말. 자신의 사후를 예견했던 것일까.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금아 피천득(97)이 25일 오후 11시 4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금아는 지난주부터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 25일 오후부터 상태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피천득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한국 수필문학계의 대표 작가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인연 中)

대표작 '인연'은 자신이 열일곱 되던 해 하숙집 딸인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내용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대표작 '인연' 등 16편의 수필작품이 수록된 '피천득 수필집'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출간됐을 때 그는 "살아있다면 지금 84세인데…. 샌프란시스코에는 일본인 이민자가 많으니 아마도 '인연'이 일어로 나왔다는 소식 정도는 듣겠지요"라는 말로 그때를 회상했었다.

하늘나라의 아이=소설가 최인호씨는 금아의 죽음을 두고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소년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딸 서영씨가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을 목욕시키고 머리를 묶어주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애지중지 여겼다. 또 자신이 '마지막 애인'이라 불렀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을 가까이 두기도 해 "아직 소년이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자신의 발표작 가운데 어린이가 읽기 적당한 시와 수필 등을 엮어 '어린 벗에게'(2002년)를 내기도 했다.

금아의 딸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중략)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 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서영이' 중)

그가 사랑한 딸 서영씨와 남편 로먼 재키(MIT 물리학 교수)씨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 역시 금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5월 29일 태어나 같은 날 떠나=1910년 5월 29일생인 금아는 2007년 5월 29일에 장례를 치르게 됐다. 자신의 98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태어난 날 세상을 접는' 인연이 됐다. 금아는 일곱 살 때 부친을, 열살 때 모친을 여의었다.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춘원 이광수를 만났고 '거문고 소년'이라는 뜻의 아호 '금아'를 그에게 주었다. 이광수는 금아에게 보다 폭넓은 문화를 배워 오라며 중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 후 금아는 이광수와 3년간 함께 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안창호가 순국했을 때 금아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 눈이 그를 주시했기 때문. 후에 금아는 이 일로 평생 마음의 고통을 씻지 못했다고 한다.

금아는 37년 중국의 후장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다. 46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6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었다. 75년부터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활동했었다.

유족으로 부인 임진호(89) 여사와 세영(재미 사업가), 수영(울산의대 신생아과 교수), 딸 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오전 7시. 02-3010-2631.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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