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의KISSABOOK] 냉혹한 야산의 삶을 선택한 토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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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경직된 한국사회. 언제인가부터 여성화의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가정에서도 엄마의 리더십이 부쩍 약발을 받는다. 학교에서도 여선생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 동네라고 다르지 않다. 동화 작가의 대다수가 여성이며, 출판사 편집자의 절대 다수도 여성들이다. 지독한 남존여비 사상을 이겨낸 한국의 딸들이 사회 곳곳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건 박수칠 일이다. 하지만 모방학습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초등학생들에게 여교사와 남교사의 비율을 조절해 줘야한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지나친 여성성은 생각해 볼 문제인 듯.

오늘은 남성 작가들의 작품만으로 차린 정찬에 엄마들을 초대한다. 메뉴는 다른 생명체와의 교류를 까맣게 잊고 사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야 할 작품들이다. 땅 내음 물씬 풍기는 이상권의 단편동화집 '멧돼지가 기른 감나무'(사계절)에는 도시 아이들에겐 생소한 나무 향과 들판의 노을이 선연하다. 애꾸가 되고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고 인간의 손길 너머에서 유유자적하는 외눈박이 암탉이 사는 곳, 멧돼지와의 끈끈한 우정의 끈을 냉혹하게 끊을 수밖에 없었던 수남 아재의 고향, 안락한 우리를 뛰쳐나가 고독하고 냉혹한 야산의 삶을 선택한 토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 그곳은 바로 인류가 태어난 태고의 땅이요, 영원히 찾아 헤매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강아지판 '배려'라고 부를 만한 박기범의 '새끼 개'(낮은산)를 읽다 보면, 비극을 부르는 일방통행의 애정이 비단 강아지와 인간 사이의 문제만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휴대폰과 문자를 주고받는 현대인들. 그럼에도 통신두절의 과거 어느 시대보다 대화단절의 고독을 호소하는 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는 건 왜일까. 이 책을 읽으며 기계문명 시대에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도사리고 있는 삭막한 불통의 문제에까지 아이의 사고가 확장될 수 있다면, 새끼 개의 비참한 죽음이 헛되지 않을 텐데….

'황소 아저씨'(길벗어린이)는 한국아동문학의 대부인 권정생과 화가 정승익이 천상의 하모니로 탄생시킨 가슴 몽클한 그림책이다. 남의 것을 빼앗는 걸 능력으로 착각하는 약육강식.과잉경쟁 시대에 보잘 것 없는 생쥐와의 더부살이를 자청한 황소 아저씨를 만난다는 건 아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임에 틀림없다.

대상연령은 '황소 아저씨'는 6세 이상, '새끼 개'는 8세 이상, '멧돼지가 기른 감나무'는 11세 이상의 어린이, 그리고 오랜 만에 아이와 풀밭에 누워 책을 읽으며 '더불어 사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픈 엄마들.

임사라 <동화작가> romans8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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