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애국 마케팅' 이젠 버립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아무리 잘나가는 회사라 해도 감히 한국 시장에 도전하겠다고?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가전으로 지구촌을 석권한 삼성과 LG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한국 시장을 한번 흔들어 보겠다는 하이얼의 의지는 대단하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오는가. 한마디로 실력이다.

하이얼은 올 2월 한정 판매이긴 했지만 국내에 40만원을 밑도는 노트북 PC를 선보였다. 성능에 비해 값이 비싸다는 소리를 듣는 한국 PC들은 속이 뜨끔했을 것이다. 하이얼은 펜 모양의 휴대전화도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며, 세탁기.에어컨.와인냉장고 등 모든 가전 품목을 망라하고 있다.

거의 10년 전 외환위기 광풍에 휩쓸려 대우전자가 사라졌다. 그 뒤 국내 가전시장은 삼성과 LG가 양분했다. 그리고 이런 구도가 아주 오래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전혀 뜻하게 않은 '선수'가 나타난 것이다. 하이얼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우선 국내 시장에 새로운 긴장을 불어넣고 있다. 이 회사는 42인치 LCD TV를 90만원대 가격으로 팔고 있다. 평판TV 가격은 이미 하락 일로에 있지만 하이얼로 인해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게 생겼다. 하이얼의 국내 영업은 일자리도 창출한다. 매장 직원이 필요하고, 누군가 물건을 사면 배달하는 사람도 써야 하는 것이다. 하이얼은 균형이라는 잣대로도 환영받을 수 있다. 삼성과 LG가 중국을 휘젓고 다니듯 중국 기업도 한국에서 그래야 한다. 세상 이치라는 게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면 사단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요즘 신문 광고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이 외제 자동차다. 도요타의 렉서스를 비롯해 BMW.아우디.볼보 등 명품 차들이 광고를 쏟아낸다. 한때 승용차의 황제로 불렸던 미국의 캐딜락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하이얼이 저가를 무기로 내수 시장을 파고든다면 외제차는 정반대 전략이다. 같은 모델인데도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두세 배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언론에서 허영 마케팅이니 과시 마케팅이니 하면서 꼬집지만 갈수록 잘 팔린다. 소득이 높아졌고 무엇보다 외제차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월급쟁이 중에서도 값만 좀 떨어지면 사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독일의 폴크스바겐, 일본의 혼다, 미국의 포드, 프랑스의 푸조가 이 틈새를 파고든다.

가전은 우리 기업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자동차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도 현대자동차그룹이 내수시장의 75% 안팎을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정부와 국민의 '애국 마케팅'에 힘입은 바 크다. 처음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이런 반(反)시장적 점유율에 놀란다. 이 문제는 특히 미국을 자극한다. 한때 자동차 왕국 소리를 들었던 나라에 한해 70만 대나 팔아먹으면서 수입은 고작 4000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천하의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새로 하자고 억지를 부릴까.

무역은 물론 모든 게임은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면 보는 이들도 재미가 덜하다. 재미도 그렇지만 일방적인 게임은 소비자 이익에도 반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하이얼 매출이 늘어날 때 소비자들은 더 좋은 삼성 제품을 더 싼 가격에 만날 수 있다. 포드와 혼다가 길에 막 굴러다녀야 현대차의 잔고장이 줄어들고 서비스도 좋아지는 법이다.

심상복 국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