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holic 채인택 런던취재기 #4] 여왕 즉위 기념 '걷기 길' 만든 영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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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즉위 25.50주년 기념으로 만든 보행로 '주빌리 워크웨이'의 바닥 표시. 이 걷기 길을 따라 가다보면 곳곳에 나타난다.

▶16개국의 군주를 겸직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걷기 이야기지만 영국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영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여왕은 사실 1개 국가의 군주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16개 주권국가의 군주를 겸하고 있습니다. 16개의 왕관을 쓰고 있는 셈이지요. 캐나다.호주.뉴질랜드.자메이카.바베이도스.바하마.그레나다.파푸아 뉴기니.솔로몬 군도.투발루.세인트 루시아.세인트 빈센트앤드그레나딘.안티과앤드바부다.벨리제.세인트키츠앤드네비스가 해당 국가입니다. 캐나다.호주.뉴질랜드를 빼면 나머지는 작은 나라들입니다. 섬나라가 대부분이기도 하고요.

여왕은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침 없이 군주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답니다. 관심을 균등하게 가지라는 것인데, 집이 영국인데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들은 과거 영국의 영토였다가 독립한 뒤에도 여왕을 계속 군주로 모시는 나라들입니다. '영연방 왕국(Commonwealth Realms)'으로 불립니다. 영연방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여왕은 이들 나라에 대리자인 총독(Governor-General)을 파견합니다. 물론 실권 없는 명예직이지요. (급료는 꽤 된답니다) 16개국에 사는 '백성'이 1억2800만 명에 이른다는군요.

▶53개국 모인 영연방 수장까지…

여기에다 한때 영국의 해외영토였다가 독립한 뒤 군주가 없는 공화국이 되거나 말레이시아.통가.스와질랜드 등 다른 왕실이 들어선 37개 나라를 더한 53개국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이란

'주빌리 워크웨이'를 알려주는 기둥.

국제기구를 이루고 있습니다.여왕은 이 영연방의 수장이기도 합니다.영국에 노르만디 왕가를 이룬 노르만디 공작의 작위도 지금 여왕에게 계승되어 있습니다. 영국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피지의 대추장직도 보유하고 있고요. 실질적인 권한은 없지만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높은 사람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25주년이나 50주년 기념행사는 영국은 물론 영연방 왕국, 나아가 영연방에서 가장 큰 행사일 것입니다. 아무리 군림만 하고 통치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군주, 또는 영연방의 수장 아닌가요.

▶즉위 55주년…26세에 왕위에 올라 올해 81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올해로 왕위에 오른 지 55년이 됐습니다. 그러니 1977년에 즉위 25주년을, 2002년에 50주년을 맞았습니다.52년 2월 아버지 조지 6세가 세상을 떠난 즉시 왕위에 올랐습니다.대관식은 53년 6월2일 이뤄졌습니다. 1926년 4월21일에 태어났으니 나이가 만으로 81세입니다. 만 26세가 되기 전에 여왕이 된 것이지요. 영국에선 즉위 25주년은 실버 주빌리(Silver Jubilee), 50주년을 골든 주빌리(Golden Jubilee)라고 부릅니다. 결혼 25주년과 50주년을 뜻하는 은혼식, 금혼식과 같은 용어지요.

군주가 즉위하고 50년은 물론 25년간 왕위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조선 왕조의 왕들을 살펴보니 82세까지 살며 51년 7개월 동안 왕위에 있던 영조가 유일하게 골든 주빌리를 누렸습니다40년 이상 왕위를 지킨 왕이 숙종.성종.숙종 정도네요. 참고로 조선 왕조 국왕의 평균 재위기간은 19년 2개월이었으며, 평균수명은 44세였답니다.

2002년 10월24일 자신의 즉위 50주년 기념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주빌리 워크웨이의 새 안내판 제막식에 참석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25주년과 50주년 선물이 '주빌리 워크웨이'라는 공공 보행로

그런데 그런 여왕의 즉위 25주년과 50주년 때 영국 국민이 선물했던 것이 다름 아닌 공공 '걷기 길(walkway)'이었다는군요. 바로 런던 중심지를 지나는 '주빌리 워크웨이(jubilee walkway)'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25주년 때 이 길을 선물하고, 50주년 때는 이를 확장, 수리해서 다시 선사했습니다. 여왕만이 걷는 길이 아니라, 시민이 걷는 공공 보행로입니다. 즉위 25주년과 50주년 기념 보행로인 것이지요.

즉위 25, 50주년 기념 행사는 걷기 길 개막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군요. 영국인에게 걷기와 보행로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77년에 개통된 전철노선은 원래 플리트 라인으로 이름붙일 예정이었으나, 여왕의 즉위 25주년인 해에 개통됐다는 이유로 이름을 주빌리 라인으로 고치는 등 다른 사례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행사는 바로 주빌리 워크웨이의 개통이었다는군요.

▶런던 시민들 두고두고 걸으며 여왕 기려

'주빌리 워크웨이'의 전체 지도. 총 길이가 23km에 이른다.

기념행사의 핵심이 바로 이 길의 개통이라는 점은 이 길이 여왕에게 바친 가장 큰 길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즉위 25, 50주년 기념을 뜻하는 주빌리라는 이름을 붙여 시민들이 두고두고 이용하며 즐기면서 이를 되새길 수 있게 한 것이지요. 국민에 여왕에게 명예를 선물한 것이지요. 사실 여왕은 영국에서 손꼽는 부자인데다, 정부에서 거액을 활동비로 받고 있으니 재물에 별 욕심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재물보다 명예가 더 좋은 선물이겠죠.

참고로 여왕의 소득은 대부분 부동산 임대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여왕은 영국 제1의 지주랍니다. 게다가 그 소득에 대한 세금도 계속 면세 혜택을 받다가 극히 최근에야 내기 시작했습니다.

'주빌리 워크웨이'에 포함되는 런던 사우스뱅크 문화복합단지를 시민과 관광객들이 걷고 있는 모습.

(계속)

채인택 기자(중앙일보 국제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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