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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자녀살인' 위험수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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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불황이 낳은 가족의 비극인가, 철없는 부모의 패륜인가. 최근 생활고에 몰린 부모가 어린 자녀를 숨지게 하거나 동반자살하는 '가족잔혹사'가 잇따라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월 이후 부모 손에 자녀가 희생된 사건은 전국에서 모두 12건으로, 어린 자녀 23명이 숨졌다.

지난 19일 6세.5세 남매를 영하의 한강 물에 던진 李모(24)씨는 경마.도박으로 3천5백여만원의 카드빚이 쌓이자 이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李씨가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일상 생활이나 판단력엔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남매의 시신은 20일 오후 동작대교 아래에서 경찰과 순환구조대에 발견됐다. 던져진 지점에서 하류 쪽으로 20여m 내려간 강 바닥에서 티셔츠 차림으로 인양된 남매의 시신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었으며, 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 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李씨는 21일 서울지법 서부지원의 영장 실질심사를 거쳐 구속됐다. 李씨는 뒤늦게 "아이들이 저 세상에서 고생 없이 살게 해주고 싶었다"며 후회했다.

이 같은 가족잔혹사는 대부분 생활고.사업실패.주식투자.카드빚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지난 7월 17일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선 주부 孫모(34)씨가 아파트 14층에서 세 자녀와 함께 동반 투신했다.

당시 아이들은 "엄마 살려줘, 안 죽을래"하며 애원했지만, 남편이 가출한 뒤 일용직 노동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리던 孫씨는 끝내 가족 동반자살을 택했다.

같은달 경기도 용인에선 카드빚 1억원을 갚지 못한 회사원 조모(34)씨가 아들(3)과 노모(68)를 목졸라 숨지게 하고 아내(30)마저 살해하려다 실패, 경찰에 붙잡혔다.

8월엔 울산시 울주군에서 주식투자로 1억3천만원을 날린 것을 비관한 주부 吳모(38)씨가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의 목을 조른 뒤 자신도 13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9월 26일 전주에선 생활고에 시달리던 禹모(36)씨가 부인(36)및 세 남매와 함께 승용차에 탄 채 불을 질러 동반자살했다.

지난달엔 대전에서 사업실패를 비관한 40대 가장이 공기총으로 아내와 중학생 두 남매를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녀와 동반자살하는 부모들은 대부분 30대로, 절망과 좌절을 딛고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크다.

연세대 의대 이홍식(李弘植.정신과)교수는 "급격한 산업화와 전통 가족구조 해체의 과정을 겪으면서 젊은층이 바람직한 가장(家長)의 역할 모델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고 부모가 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李교수는 "특히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젊은 세대들이 물질적 좌절에서 오는 충동적 행위를 자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며 "가족의 가치와 생명존중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하 기자

<주요 자녀살인 일지>

▶7월 17일 인천-생활고 30대 주부, 세 자녀와 아파트서 투신

▶7월 31일 울산-주식실패 30대 주부, 두 자녀 살해하고 투신

▶9월 26일 전주-부도 30대, 아내.세 자녀와 승용차에 불 질러

▶10월 19일 서울-생활고 40대 가장, 희귀병 딸 산소호흡기 떼

▶11월 4일 대전-사업실패 40대, 아내.두 자녀 공기총으로 쏴

▶12월 4일 시흥-경마 빚 40대 부부, 두 자녀와 함께 음독

▶12월 19일 서울-카드 빚 20대 남성, 두 자녀 한강에 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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