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한국 3대 재벌 될 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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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24일 선경화섬 기공식. 앞줄 왼쪽에서 다섯째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이 최종건 회장이다.

이코노미스트
‘석유에서 섬유까지’. SK그룹이 1980~90년대 사용하던 기업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어디서 나왔을까. 고(故) 최종건 회장이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석유사업 진출에 대한 심중을 가지고 있었다. 울산직물을 설립해 그곳에 현장 시찰을 갈 때마다 그는 “내가 이거 인수해야 하는데”하면서 오른손을 뻗어 유공(현 SK주식회사)을 가리켰다.


“여름에 잘나가는 옷감은 없나?”

1965년 6월로 접어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무더워지고 있었다. 직물업계로선 피할 수 없는 비수기고, 최종건으로선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고비다. 최종건은 공장장이던 조용광을 불렀다. 불황을 타개할 비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글쎄요. 시원한 옷감이라야 하는데…. 나일론이나 실크는 몸에 달라붙어서 여름에는 인기가 떨어지거든요.”(조용광)

“그러면 삼베나 모시 같은 옷감을 개발해보라고!”

갑갑했다. 최종건은 답답해 하면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 사실 조용광도 여러 가지 신제품 개발을 시도하고 있었다. 열처리를 달리 해보기도 하고, 아세테이트에 아교풀을 먹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바로 그날 당시 직물업계를 뜨겁게 달군 킬러 애플리케이션(획기적인 신상품)이 탄생한다.

그날 밤 최종건은 손님 접대를 위해 단골 술집에 갔다가 우연히 여종업원이 입고 있던 치마 저고리에 주목했다. 색상이 선명하면서도 통풍이 잘돼 보였다. 물어보니 “갑사 치마 저고리 여섯 벌 값 나가는 밀수품”이란다.

술이 확 깼다. 최종건은 그 자리에서 그 치마 저고리를 샀다. 알아보니 폴리에스테르 가연사(假撚絲)로 제직된 ‘조제트’라는 직물이었다. 가연사란 ‘임시로[假] 꼬아서[撚] 만든 실’을 일컫는다. 이 실로 제직된 직물은 까칠까칠한 느낌이 나면서도 은은하게 속이 비쳤다. 물론 통풍도 잘돼 여름 옷감으로는 ‘120점짜리’였다.

문제는 기술력이었다. 최종건은 조용광과 일본으로 날아갔다. 먼저 도레이를 찾아가 생산비법을 물었지만 “가공기술이 중요하다”는 답변을 들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후쿠이(福井)와 가나사와(金澤) 지방을 견학했다. 어깨너머로 가연사를 고압 스팀에 쪄내면 연지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스팀 압력과 온도, 가열 시간과 횟수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수원으로 돌아온 최종건의 인사는 “깔깔이는 어떻게 돼 가나”였다. 이미 조제트는 완제품이 나오기도 전에 ‘깔깔이’로 불리고 있었다. 그해 11월 최종건의 독려 끝에 선경은 조제트 제직용 가연사를 개발했다.

66년 6월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간 선경의 깔깔이는 ‘없어서 못 파는’ 상품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품질은 일제와 비슷한데 가격은 10분의 1도 안 됐다. 그래도 생산원가는 150원에 불과했다. 외국에서 수출 주문도 밀리면서 효자 노릇을 단단히 했다.

▶기공식에서 회사의 발전 방향에 대해 연설하는 최종건 회장.

없어서 못 판 히트상품 ‘깔깔이’

그러나 최종건은 이미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66년 1월 30일 최종건은 임원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최종현도 있었다. 갓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이던 이순석과 손길승도 이례적으로 배석했다. 평소와 달리 단아한 양복 차림이던 그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선경은 악전고투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닭표 안감’으로 인조견 시대를, 봉황새 이불감으로는 본견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합섬 직물에 도전해 나일론을 생산했고, 62년엔 수출 길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제 회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릴 ‘선경 5개년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이어서 최종현이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66년엔 아세테이트 공장을, 67년엔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68년엔 수원 공장만 한 직물공장을, 69년엔 봉제공장을 지어 섬유에 관한 종합기업이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임원들의 반응은 덤덤했다. 일주일 전에 인수하기로 결정한 해외통상 인수자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종건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당장 아세테이트 공장 건설부터 밀어붙인다. 데이진이 투자 파트너였는데 공장 설립은 처음부터 난항에 부닥친다.

“나만 믿어라”는 데이진의 고자세도 문제였고 차관 교섭도 만만치 않았다. 최종건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단 수원 정자동에 사놓은 공장 부지의 정지작업부터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큰소리를 쳐놓고 한창 차관 교섭 협상을 벌일 때 일이다. 그는 한국 주재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과 차관 도입선인 이토추의 간부들을 단골 술집으로 초대했다. 한창 주연이 무르익을 무렵, 최종건이 “여러분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술자리를 나온 최종건은 술집 주인에게 “어디 조용한 방 없느냐”고 태연하게 묻는다.

“왜 그러세요?”(술집 주인)

“잠이나 자 두게.”(최종건)

“…….”

“이것은 누구에게도 비밀이야.”

회사의 명운을 걸어야 할 중요한 차관 도입 미팅 자리에서 엄청난 결례를 범한 것이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최종건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거 죄송합니다. 저 위에 좀 다녀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하는 것이다.

“저 위에 좀 다녀오느라… ”

일본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선경이 정부도 알아주는 유명한 회사”라는 시위를 한 셈이다. 최종건의 기지가 돋보이는 협상 전략이었다. 결국 그는 67년 3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차관 545만 달러를 얻어낸다.

한편으론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추진했다. 원래는 62년부터 구상해뒀으나 일이 더뎌진 것이다. 역시 데이진이 기술 협력 파트너였다. 데이진에서는 기술 이전보다 합작을 고집했다. 최종건은 “처음에 합작회사를 만들자. 그런 연후에 우리가 인수하면 된다”며 승낙한다.

“합작에도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 않겠어요?”

최종현이 물었다. 62년 아버지인 최학배 옹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최종현이 들어와 있던 때였다. 그는 그해 11월 5일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했다. 최종현의 협상으로 데이진과 투자 비율을 50대 50으로 했다. 모두 2600만 달러를 투자해 하루 생산량 7t의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하는 데 합의했다.

선경이 부담해야 할 돈은 외자 700만 달러와 내자 16억원이었다. 68년 3월 18일 두 회사는 폴리에스테르 사업 합작투자에 관한 기본협약을 맺는다. 며칠 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 기공식이 열렸다. 예정 공기는 15개월, 모두 합쳐 32억원이 필요했다.

이 돈을 조달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최종현이었다. 최종현은 데이진과 담판을 통해 3년 연불(延拂·대금 지급을 연기해 주는 거래) 조건으로 원사를 외상으로 들여왔고, 이를 원료로 제품을 만들어 팔면서 공장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62년부터 최종현 합류해

두 사람의 합작으로 공장 건설은 착착 진행돼 68년 12월에 아세테이트 공장이, 69년 2월엔 폴리에스테르 공장이 준공됐다. 당초 예정했던 공기를 6개월씩이나 앞당긴 것이다. 규모도 커졌다. 69년 7월 선경합섬은 애초 7t을 계획했던 하루 생산량을 21t으로 늘렸다.

회사 일이 바쁜 와중에도 최종건은 가정 살림을 세심하게 챙겼다. 장남이던 최윤원의 공부를 위해 가정교사도 뽑았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 다니던 유재환이 가정교사로 있었는데, 어느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최종건이 유재환을 붙잡고 말했다.

“두고 보시오. 내가 앞으로 한국 3대 재벌이 될 거요. 유 선생은 대학 졸업 후 꼭 우리 회사에 와서 근무해야 합니다.”

허풍이 아니었다. 그의 지향은 석유회사였다.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이 완공되자 선경은 명실상부한 섬유업계 대표기업으로 부상한다. 이제 그는 원자재에서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석유화학 수직 계열화를 이룬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직물의 원사는 그 원료를 석유에서 뽑는 것이다. 이미 그의 꿈은 ‘석유에서 섬유까지’였다.

“석유 얘기만 나오면 찌푸리나”

일단 68년 8월 수원 직물공장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울산직물을 설립했다. 최종건은 울산직물 초대 공장장으로 김봉환을 내려보냈다. 울산에 들를 때마다 김봉환에게 하던 말이 있었다.

공단 어디론가 자동차를 달리던 그는 “봉환아 내가 이거 인수해야 하는데…”라면서 오른손을 뻗었다. 김봉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종건이 가리킨 곳은 국내 유일의 석유회사인 유공이었다.

“석유회사를 하시려고요.”

“이왕이면 석유에서 섬유까지 전부 해야지.”

서울로 돌아온 최종건은 동생을 불렀다.

“일전에 얘기한 석유공장 말이다.”

최종건이 운을 뗐다. 그러나 최종현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최종현은 석유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너무 이르다고 판단해서다.

“석유 얘기만 꺼내면 왜 이마에다 ‘내 천(川)’자를 긋니?”

“차관 도입도 아직 승인 안 나고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계속>

최종건의 가족 경영

“그리스도 그림 팔아 美 유학 동생 학비로”

2세 경영승계가 관례화돼 있는 한국 재벌사에서 SK는 보기 드문 기업이다. 최종건 회장이 창업해 동생에게 경영권을 넘겨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형제애가 오늘날 SK그룹이 있는 데 든든한 자양분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종건은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직원까지 꼼꼼히 챙겼다. 50년대 후반 공장 재건에 힘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이용진을 불러 “문직부에 옥분이가 결혼한다며”라고 묻는 것 아닌가. 최종건은 “이불감 두어 벌하고 재봉틀 사줘라”고 지시한다.

이용진이 “재봉틀은 반장급 직원에게만 결혼선물로 주는 것인데 옥분이는 반장이 아니잖아요”라며 머쓱해 하자 최종건은 “옥분이만 한 창업 공신이 없다”며 마치 친정아버지 같은 말을 한다.

가족 사랑도 끔찍했다. 특히나 동생 사랑은 부정(父情)에 가까웠다. 막내 최종욱이 결혼할 때 일이다. 예식장 입구에서 혼주로 하객을 맞던 최종건이 동생의 넥타이를 매만져주며 “신랑의 넥타이가 비뚤어져 있으면 쓰나”하면서 눈물을 훔친 얘기는 유명하다.

동생 최종현의 미국 유학 비용을 마련해준 것도 눈물겹다. 유학 중인 동생을 선경직물 부사장에 올린 것은 물론, 학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애썼다.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온 편지를 뜯은 최종건은 “그리스도 초상화가 잘 팔린다. 달러 송금이 어려우면 그림을 소포로 보내달라”는 말을 듣고 당장 도안부의 조용민을 불렀다.

조용민은 당대 최고의 도안사였던 조용광 공장장의 친동생이였다. 홍익대 회화과 출신으로, 조용민이 화집을 보고 그리스도 그림을 그리면 최종건은 이것을 미국의 최종현에게 보냈다. 이 그림을 판 돈으로 최종현은 현지에서 유학비용과 생활비로 썼다. 최종현의 미국 유학에 ‘짝퉁 그리스도 그림’이 지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두 사람의 우애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73년 최종건이 작고하자 최종현은 “나는 10남매의 아버지다”라며 조카들을 보살핀다. 최종건은 3남 4녀를, 종현은 2남 1녀를 두었다.

<이코노미스트 8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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