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그림자' 서갑원 비서관이 본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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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 바라본 盧대통령의 지난 1년은 어떠했을까. 출범 초부터 지난 8월까지 의전비서관을 맡아 盧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서갑원(徐甲源.41.사진)정무1비서관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청와대의 이면을 털어놨다.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盧대통령은 지난 5월 21일 5.18행사추진위 간부를 만났다. 사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일과 관련해 추진위 관계자들이 면담을 요청해 갑작스럽게 잡힌 자리였다. 강신석 재단 이사장이 "죄송하다. 의도된 것은 전혀 아니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와 마음이 아프다"고 사과했다.

분위기는 어색하고 무거웠다. 盧대통령은 국정을 원만히 이끌어가야 하는 대통령으로서의 고충을 호소했다. 그러던 중 이 발언이 나왔다. 이 푸념은 일종의 감칠맛 나는 사투리성 표현이었다. 시골에서 하는 "워메, 힘들어 정말 죽겄네"라는 식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그 말이 있자 참석자들 모두 파안대소하며 웃고 넘겼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30여분간의 접견이 끝난 뒤 일행은 돌아가고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인터넷 매체에서 이 발언의 파문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파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금실과 김두관, 그리고 탈당=취임식 날 내각 내정자가 발표되자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특히 강금실 법무부 장관 내정 소식이 전해지자 법무부와 검찰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사실 검찰은 그간 각종 채널을 총동원해 반대 의사를 전해왔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다. 대통령은 康장관에 대한 애착이 컸다. 김두관 행자부 장관에 대한 국회의 해임권고안이 의결됐을 때도 대통령은 격노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국민도 이번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보름간 고민하다 결국 받아들였다.

하지만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 임명동의안조차 부결됐다. 盧대통령은 "더 이상 이런 상태로는 안 되겠다"며 사흘 뒤인 9월 29일 민주당을 탈당했다. 언젠간 탈당했겠지만 尹후보건이 시기를 앞당긴 것이다.

◇화물연대 파업=5월 11일 대통령은 미국 순방길에 오르는 날, 그것도 일요일에 국무회의를 소집해 화물연대 파업의 조기 수습을 촉구했다. 대통령은 주요 방미 목적이었던 외국인 투자단 유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핵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미국과의 공조, 그리고 국내경기 활성화를 위한 외국인 투자단 유치는 참모들이 귀가 따갑게 듣던 두 가지 핵심 과제였다.

방미 사흘째, 뉴욕의 한 호텔에 마련된 집무실에 들어선 盧대통령은 잠시 방을 거닐다 갑자기 책상 쪽으로 걸어가더니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처음엔 어디로 전화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곧이어 "나 대통령인데…"하는 거였다.

청와대 교환원이 무척이나 당황했던 것 같다. 국정상황실.당직실.경호실 종합상황실 등을 잇따라 연결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결국 盧대통령은 수화기를 털썩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문제가 됐던 사안이지만 결코 돌출행동이나 즉흥적인 쇼가 아니었다.

◇권양숙 여사와의 일화=盧대통령이 자주 실수하는 게 하나 있다. 행사장에서 대통령이 차에서 먼저 내려 기다린 뒤 왼쪽 문에서 내린 권양숙 여사가 돌아와 대통령 옆에 서면 함께 들어서야 한다. 그런데 종종 盧대통령은 權여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성큼성큼 걸어 혼자 행사장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나지막히 "대통령님"이라고 주위를 환기시키곤 했다. 요즘에도 權여사는 먼저 가려는 대통령을 향해 "정지"라고 외치곤 한다.

월간중앙=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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