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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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어떻게하면 현대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빈번히 받게되는 질문중 하나다. 흥미있는 일은 이 질문에서 핵심이 되는 「현대음악」을 「전통음악」이란 단어로만 바꾸어 놓은 질문 역시 자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질문은 현대음악이나 전통음악의 난해성에 대한 가벼운 비난을 풍기게 마련이다.
『음악의 즐거움(The Enjoy·ment of Music)』이라는 유명한 음악감상입문서를 쓴 미켈리스라는 사람은 그 서장에서 옛 사람들이 한 곡의 음악을 듣기위해 얼마나 오랜시간을 기다리고 준비하여 연주회장에 이르렀으며 또 얼마나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음악이란 물을 마셔 왔는가를 설명하면서 현대인들이 간단한 손조작으로 너무나 쉽게 음악이라는 수도를 틀었다 잠갔다하며 음악의 가치와 그로부터의 즐거움을 잊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분명 우리들은 무심코 듣게되는, 소위 편히 앉아 있어도 들리는 음악의 홍수에 빠져 노력해 들어야 하는 음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듯 보인다.
밭에서 부르는 농부들의 민요가락, 집시들을 충추게하는 음악, 구걸 나온 걸인의 각설이타령은 「들리는음악」이다.
주변을 정돈하고 고요함을 기다려 두귀를 열고 이들의 소리에 온 신경을 쏟아야할 필요는 없다. 골목길 술취한 사람의 유행가는 「들리는음악」이어도 좋고 유행가를 부르는 가수앞에 넋을놓고 「들어도」좋다. 그러나 음악중에는 흘리듯 「들리는」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쉽사리 파악할수 없는 음악도 얼마든지 있다. 이들은 「듣는 음악」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며, 특히 「현대음악」이나 「전통음악」은 그 기본이 되는 재료에 익숙해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홍콩페스티벌의 기획자이며 새로운 음악에 항상 열렬한 영국친구가 『나에게는 한국의 전통음악도 새로운 음악』이라며 음반을 사갔다. 모든 것이 요행이 주어진 것이라 믿기 쉬워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들려오는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음악」을 권하고 싶고 그만큼 음악의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진지한 자세를 갖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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