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 함성이 귓전을 울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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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16면

찌는 듯한 땡볕 속에 1000명을 헤아리는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부녀자와 노인들은 물론 젖먹이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수레에 살림살이를 싣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 마치 피란 행렬을 연상시켰다. 흰색 피부의 보안관은 말을 타고 연방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1875년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이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테미큘라의 한 산기슭. 실개천이 흐르긴 했지만 돌산을 배경으로 덤불이 우거진 척박한 땅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남서부 지방의 비옥한 땅에서 1만 년을 살아왔던 페창가(Pechanga)족은 문명을 앞세운 백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살던 집을 빼앗기고 그렇게 주거지를 옮겨야 했다.

투어 에세이 ⑩ 테미큘라 크리크 인 골프장

그로부터 132년이 지난 2007년 5월. 페창가 부족이 이주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바로 그 장소엔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테미큘라 크리크 인(Temecula Creek Inn) 골프장. 5월인데도 한낮 기온이 섭씨 32도를 넘어선다. 이글이글 내려쬐는 태양이 살갗을 태울 듯하다. ‘테미큘라’란 도시 이름이 인디언 말로 ‘해가 비치는 장소(the place of the sun)’라더니 이제 수긍이 간다.

골프장에 들어서니 마치 산장을 연상시키는 리조트 호텔이 눈에 띈다. 그 호텔 사이로 크리크, 오크스, 스톤하우스 등 3개 코스 27개 홀이 둥지를 틀고 있다.

크리크 코스 1번 홀. 핍박받던 인디언들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 터전에는 이제 사람들이 옮겨 심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들이 경작을 위해 맨손으로 쟁기질을 했던 메마른 땅에는 스프링클러가 뿌려준 물을 먹고 자란 푸른 잔디가 자라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바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돌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나무 한 그루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저 돌산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인디언들이 눈물을 흘렸으랴.

오크 코스의 네 번째 홀인 13번 홀(파4·아래 사진).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티잉 그라운드 옆의 나무그늘을 찾았더니 커다란 바위가 평상처럼 놓여 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바위 위엔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3개의 둥그런 홈이 파여 있었다.

“이게 뭔지 아나. 인디언이 살았던 흔적이라네.”

굳이 함께 라운드하던 동료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필자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바로 인디언이 음식을 해먹던 장소임을 알아차렸다. 뜨거운 태양과 비를 피하기 위해 바위 틈새에 거처를 마련했던 페창가족은 저 반듯한 돌 위에 죽은 야생동물의 시체를 늘어놓고, 마른 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으리라. 그곳은 페창가족의 침실이자 거실이었고, 주방이었던 셈이다.

돌산을 배경으로 들어선 골프 코스는 다이내믹하다. 메마르고 가팔라 농사를 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 골퍼들에겐 다이내믹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내리막인가 하면 곧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리조트 코스치고는 꽤 까다로운 편이다. 특히 오크 코스는 경사가 심한 홀이 많다. 인디언 유적지가 있는 13번 홀이 시그니처 홀이라 할 만하다. 오르막 경사를 바라보며 티샷을 한 뒤에는 다시 계곡을 건너야 그린에 다다를 수 있는 까다로운 홀이다. 골프 자체도 좋지만 인디언의 발자취를 더듬는 묘미도 느낄 수 있다.

골프장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사막이나 다름없는 곳에 갑자기 2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이 나타났다. ‘페창가 카지노’란 문패가 선명하다. 인디언들이 살던 그곳엔 이제 카지노가 들어서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휘황찬란한 불을 밝힌 채 밤새도록 슬롯머신이 돌아간다. 일행 중 한 명이 “카지노 수입 일부가 페창가족을 위한 기금으로 조성된다”고 귀띔했다.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거꾸로 뒤집으면 인디언 멸망의 역사가 보인다고 했던가. 인디언의 쇠락을 놓고 어설프게 책임을 논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그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니까. 그렇지만 강인하고 용맹하던 페창가족은 어디로 갔는가. 말을 타고 들판을 내달리며 포효하던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검은 눈동자에 어린 그들의 눈물에서 연민을 느끼는 건 우리 역시 핍박으로 얼룩진 한 맺힌 역사를 가졌기 때문인가. 1만 년을 살아온 원주거지에서 쫓겨났던 그들은 이제 골프장에서 10분 거리에 자리잡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다. 페창가족 인터넷 홈페이지에 쓰인 문구 한 구절.

‘우리의 뿌리는 이 땅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선조들의 유해는 재가 되어 아직도 태양빛이 찬란한 이 땅을 덮고 있다(Our roots are sunk deep into the land. The ashes of our ancestors cover this place where the sun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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