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패망월남 교민철수 비화|외국인에 「탈출티킷」 팔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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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75년 4월30일, 마침내 월남국기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전쟁의 성격상 당초부터 미국의 승산은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적토마를 탄 관운장도 늪속에서는 힘쓸수 없는 법이다.』(김성은 전국방장관)
월남패망으로 한국은 초비상이 걸렸다.
박정희대통령은 월남적화 전날인 75년4월29일 대국민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현재 월남정부는 지난 열흘사이 2명의 대통령이 경질되었고 정부조직도 안되고 있는 형편이다. 인도지나반도의 정세는 결코 강건너 불이 아니다.』
『금년에 북한공산집단이 불장난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이 남침할 것이다, 안할 것이다 또는 남침의 위험이있다, 없다등의 정세분석이나 토론을 할 시기는 지났다. 북한이 전쟁을 도발해온다면 정부나 나 자신도 6백50만 서울시민과 함께 서울을 사수할 것이다.』

<미선 몰래 시나리오>
박대통령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필사칙생 필생칙사」를 인용하며 국민들의 경각심을 촉구했다.
보름뒤인 5월13일 월남에있던 우리 교민과 월남·필리핀 난민등 1천3백여명을 태운 해군수송선(LST)두척이 부산항에 들어왔다. 바로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 9호」를 의결했다. 유언비어유포나 유신헌법 부정·반대금지, 학생의 집회와 시위금지, 덧불여 이를 보도하는 행위도 일절금지.
1주일뒤인 20일 열린 국무회의는 다시 「학도호국단설치령」을 의결했다.
월남의 망국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국민다수의 위기감속에 진행된 체제강화작업은 점차 극단으로 치eke고 있었다.
「사이공 최후의 날」을 앞둔 75년초 주월한국대사관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비상철수계획을 세웠다. 1월31일 수립된 최초의 계획에 따르면 적의 총공세 징후가 농후할 때 전원이 철수준비를 하도록 하고(준비단계), 본격적인 철수작업은 3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사이공 방향에 대한 적의 총공세가 시작됐을때)-공관원가족 철수 ▲2단계(사이공 외곽 주저항선에 적이 도달했을 때)-필수요원을 제외한 상무관·건설관·일반교민·노무자등은 전원철수 ▲3단계(적의 로킷이나 장거리포탄이 사이공 시내에 떨어질때)-필수요원도 마저 철수.
이 계획안은 철수에 따른 운송수단으로 대한항공의 여객기와 공군기·해군함정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월남패망은 너무 빨리 닥쳤다. 당시 관계자들에 따르면 우리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은 베트콩측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여 자국민의 안전철수를 최우선순위로 한 「사이공 함락 시나리오」를 이미 짜놓고 있었다고 한다. 베트콩의 대규모 병력이 미공군의 폭격도 두려위하지 않고 사이공외곽 벌판에 버젓이 진치고 있으면서 「D데이」를 기다렸던 점등 많은 정황증거도 있다.

<교민 백50여명 억류>
결과적으로 한국대사관원과 교민들의 철수작전은 흠을 남겼다. 9명의 우리 외교관과 1백50여명의 교민들이 공산화된 베트남에 남아 큰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특히 이대용공사(67·현 한국해음회장)등 3명의 외교관은 5년여동안 형무소에 억류돼 있으면서 베트남과 북한요원들에 의해 갖은 핍박을 당해야 했다.
증언들을 종합하면 한국측의 철수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지못한데는 세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당시 대사관 고위간부들은 미국을 너무 믿음직스럽게 여겼다. 김영관 당시대사(67)는 『솔직히 말해 탈출하기 위해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한국공관원과 교민)는 미국대사의 책임하에 놓이게 됐다』고 말했다. 이대용공사도 『마지막에 미군헬기로 철수시킨다는 약속을믿은게 잘못이었다. 미국이 급할때는 자기나라를 우선한다는것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적어도 우리 헬기 한대는 예비해두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둘째, 일부 교민들은 설마하는 생각에 월남을 떠나려 하지않았다. 이들 대부분이 전황을 낙관했고 「돈벌이」에 강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해군의 LST에 일단 승선한뒤 도로 내린 교민들도 있었다. 김영관씨는 『무조건 탈출하라고 종용해도 「한국에가면 대사님이 일자리 주시렵니까」라고 반발해 아주 애를 먹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셋째, 우리 대사관 관계자들간에 손발이 맞지 않았다. 극도로 불안했던 당시 정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몇가지 판단미스가 있었고, 이 점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또 관계자들 각자의 이해관계와 경험범위, 기억력 정도에 따라 똑같은 사실에 대한 증언들마저 엇갈리는 경우가 많아 취재에 나선 기자를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게다가 월남철수 당시의 국내상황은 이같은 시비와 공과를 햇빛아래 만천하에 명백히 가려낼만큼 탄력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종교인까지 관련>
그러나 이런 점들은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한가지 묵과하기 어려운 일이 당시 저질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추악한 「목숨장사」라고나 할까?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측 일부 관계자와 몇몇 한국인근로자들이 한국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월남·대만인들로부터 부산행 LST에 승선시켜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증언자들은 『17년간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쉬쉬해온 일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돼야 한다』며 이같은 비리를 털어놓았다. 한 증언자는 이 「탈출티킷 판매」에 모 종교인이 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재월남 한국인교민회장 출신인 유남성씨(75)의 회고를 먼저 들어보자. 유씨는 75년당시 철수대열에서 탈락했다가 한국·프랑스 외교관계자들의 노력으로 3년뒤인 78년8월26일 간신히 고국에 돌아왔다.
『월남패망직후 평소 알고 지내던 월남군 소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한국해군의 LST(815함)를 타고 탈출하려다 1인당 6백∼8백달러를 내라는 한국인의 요구에 「너무 비싸다」며 값을 깎으려다 결국 승선하지 못했답니다. 소령의 일가족은 총6명이나 됐어요. 그는 공산치하가 되자 뒤늦게 후회됐던지 나에게 「지금이라도 그 돈을 줄테니 탈출을 알선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더군요.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후 소령의 일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모릅니다. 나중에 들린 소문으로는 그 일에 관여한 한국인들이 수십만달러를 벌었다고도 합디다.』
「승선권」은 다름아닌 리번이었다. 리번을 비표삼아 가슴에 달아야 수송함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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