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예찬 책 쓰는 유인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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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개월간 도쿄 땅 3분의 2는 밟았을 겁니다."

그는 지난해 말 서울문화재단 대표직에서 물러나 도쿄행을 택했다. 일본대 예술학부 객원연구원으로 문화예술 정책을 연구하러 떠났다. 밥과 빨래를 손수 하면서 유학생처럼 살았다. 거기에 걷기도 포함됐다.

"학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 30분, 걸어가면 50분이 걸리더군요. 일본은 습기가 많아 러시아워 땐 지하철이 말도 못하게 답답해요. 20분 서둘러 나와 걸어가기로 했죠."

그렇게 시작한 걷기 출퇴근이 점점 확장됐다. 출퇴근 거리만 14㎞, 거기에 다른 볼일로 걷는 것까지 포함하면 하루 25㎞씩은 걷는다. 바짓가랑이가 스치는 통에 바지 두 벌, 팬티 4장이 닳아 못 쓰게 될 정도로 걷는 재미에 빠졌다.

"차를 타거나 앞만 보고 뛰어다닐 땐 속도감 때문에 놓치던 것들을 발견하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정말 큽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공원, 동네 도서관, 동네 사람만 아는 명물,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유적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골목골목을 걷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맛집을 만났다. 그렇게 걷기로 받은 감흥을 모아 책도 쓰기 시작했다. 건강은 덤으로 얻었다. 2~3kg이 빠진 데다 근육에 탄력이 붙어 더욱 날렵해졌다.

"걷는 내 몸은 느리지만 생각은 인터넷보다 빠릅니다. 1시간을 걸으면 생각은 지구 몇 바퀴를 돌죠. 대신 걷기 1시간이 넘어가면 모든 잡념이 사라집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르는 '걷기 수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필름 하나만 찍으면 무수한 복제 브래드 피트를 전 세계 극장에서 보는 '복제 시대'죠. 그런 디지털 시대라지만 땀냄새의 근본적인 힘을 점점 더 그리워하게 될 겁니다. 저도 몸을 쓰는 원초적인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도쿄 땅을 밟다 보니 서울 생각이 절로 났다.

'남의 나라에서 6개월간 이러고 있는데, 막상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구나… '.

그래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아주 돌아오는 7월부터 '제대로' 걸어볼 작정이다.

"땅끝마을 해남부터 강원도 봉평까지 20~30일간 걸어가렵니다. 그러면서 우리 땅, 우리 문화를 자각하고 잘 살리는 길도 고민해야죠."

그러나 서울은 도쿄에 비해 걷기 불편한 도시다. 도쿄에선 다섯 시간을 걸어도 땅 위나 땅속으로 갈 일이 없단다.

"한강둔치나 청계천에서 모여 걷는 수준에서 그칠 게 아니라 일상에서 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해.가로수.가로등 등 해결할 일이 너무 많아요. 걷는 사람이 늘고, 걷기에 좋도록 고치다 보면 모든 게 자동차 아닌 인간 중심으로 바뀔 겁니다."

걷기 운동이 사회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얘기다.

"지금부터 걸어야 10~20년 뒤 살기좋은 도시가 됩니다. 많이들 걸으십시다."

[동영상 보러 가기]'워크홀릭'에 빠진 유인촌을 만나다

글=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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