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졸 취업률 96.3% … 취업 온난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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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명문 사립 게이오(慶應)대 4학년 구리타 요헤이(栗田陽平)는 요즘 대학 시절의 마지막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한 홍보대행사 입사가 이미 확정됐기 때문이다. 종합정책학부 소속인 그는 "여러 기업에서 취업통지를 받고 행복한 고민을 했다"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구리타처럼 재학 중 일찌감치 취업문제를 결정짓는 학생이 많다. 입사는 내년 4월이지만 취업을 벌써 내정받은 것이다. 기업들은 2~3월 회사설명회에서 탐나는 학생들을 미리 뽑는다. 올해는 대학 3년생을 잡는 '내내정'(內內定)이 유행하고 있다. 이른바 입도선매(立稻先賣)다.

#2. 3월 9일 벤처기업 9개 사가 공동으로 도쿄에서 개최한 취업설명회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취업 희망자가 기업들의 부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대학생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 9개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번갈아 찾아가 '구애 작전'을 편 것이다. 구직자가 들어갈 기업을 면접한 격이다. 이 행사를 기획한 이벤트 회사 'G스타일러스'는 "사람을 잡지 못해 조바심 내는 기업들로부터 올 들어 비슷한 행사 개최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며 "지난 1년간 이 같은 기업설명회를 150회 이상 열었다"고 말했다.

#3. 학교.동아리 등의 연줄을 총동원한 기업의 인재 확보 경쟁도 치열하다. 히타치(日立)제작소는 올 들어 젊은 사원 2000명에 '특명 리크루터(모집인)'란 직함을 붙여 줬다. 모교를 방문해 우수 학생을 유치해 오는 것이 임무다. 스미토모(住友)상사는 입사 3년 미만 사원 100명을 동원,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소그룹 간담회를 열고 있다. 이 회사는 180쪽 분량의 호화판 안내책자 1만4000부를 특별 제작해 각 대학에 배포하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좋은 인재를 경쟁사에 다 빼앗기고 만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3~4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장기 불황에 따른 '구직 빙하기'가 끝나고 '취업 온난화'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사립 니혼(日本)대 마쓰다 가즈오(松田和夫.독문학) 교수는 "2년 전부터 취업 상황이 호전됐다"며 "지난해 수강생들은 대부분 여름까지 취업을 끝냈는데 올해는 내내정을 받은 학생이 많아 취업 시즌이 앞당겨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일본 노동성.문부성이 조사해 16일 발표한 올봄 대졸자의 취업률은 96.3%로 나타났다. 지난해보다 1%포인트 올라간 것이다. 이 조사가 시작된 1996년 이래 최고치다. 고졸자 취업률도 96.7%에 이른다. 취업 정보업체 리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구인자 수는 취업 희망자의 두 배를 넘어섰다. 버블(거품) 경제의 절정기이던 91년 이래 16년 만이다.

삼성전자의 한 주재원은 "한국 대학생이 취직하려면 최소한 10장의 입사원서를 써야 하지만 일본 학생들은 보통 3~4개, 많으면 10개 안팎의 회사를 놓고 어디를 선택할지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직장을 골라 갈 수 있는 일본 대학생의 행복한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우리가 취업할 땐 비장감이 넘쳤다. 졸업 시즌은 다가오는데 취업이 안 되면 졸업여행도 포기해야 했다"는 30대 일본 직장인의 얘기는 먼 옛일이 됐다.

기업들이 신규 채용 인력을 대폭 늘린 것은 기본적으로 경기회복에 따른 것이다. 다른 이유는 단카이(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 은퇴에 따른 결원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기업의 인력 수요는 증가한 반면 취업 인구는 저출산 현상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이러한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대학생 몸값이 치솟고 있는 것이다.

◆ 한국 구직 시장은=청년 실업자가 150만 명에 이른다. 연초 취업포털 3사(커리어.잡코리아.인크루트)에 접수된 이력서는 7000장. 이 중 4년제 대졸자 64%가 "연봉이 2000만원도 안 돼도 좋으니 제발 일만 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석.박사 출신의 평균 희망 연봉도 2500만원 안팎에 불과했다. 입사원서를 30번 이상 쓴 이들이 수두룩했다.

도쿄=예영준.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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