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가 직장 생활 풍속도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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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이 따사로운 15일 낮 12시 30분, 서울 남산길. CJ나 SK 등 인근 건물의 구내식당 에서 서둘러 점심을 마친 샐러리맨들이 걷고 있다. 넥타이 차림에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부친 사람, 한쪽 팔에 겉옷을 걸친 사람, 한 손에 음료수를 든 사람…. 삼삼오오 걷는 모습이 다양하다. 아예 티셔츠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는 '속보족'도 있다. 인근에 사무실이 있는 ㈜CJ의 김범수 부장은 "2~3년전부터 점심시간 때 걷는 직장인들이 부쩍 많아졌다"며 "이 길은 유동 인구와 차량이 많지 않고, 남산 숲 때문에 공기도 좋은 편이어서 걷기엔 그만"이라고 말했다.

◇걷기가 바꿔놓는 직장 생활=SK㈜ CR기획팀의 이경진(28.여)씨는 대표적인 걷기 매니어다.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할 시간이 없는 그는 매일 점심 시간이면 20분 정도 회사 바로 앞의 청계천 산책로를 걷는다. "20분의 짧은 걷기지만, 오전 내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활기차게 오후를 보낼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걷기 열풍이 직장 생활 풍속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서울 중구 서소문에 직장이 있는 권혁준(41)씨는 서울시 신대방동 보라매병원 근처의 집에서 약 2.5㎞의 거리인 여의도 입구 대방역까지 걸어서 도착해 지하철을 탄다. 업무 때문에 가끔 LG타워에 갈때도 걸어간다. 4㎞ 남짓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지만, 횡단보도 신호 대기 때문에 1시간 10분쯤 걸린다. 권씨는 이렇게 걷기 시작한지 1년만에 몸무게를 5㎏이나 뺐다. 술을 좋아했지만, 걷기 시작한 뒤에는 술자리도 줄었다. "돈과 시간을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운동으론 최고"라고 자랑한다. 다만 권씨는 "서울 시내 공기가 좋지 않아 기관지가 약해진 것 같다"고 아쉬워한다.

㈜CJ 김성원(30)씨는 업무를 일찍 마치면 부서원들끼리 인근 남산도서관 뒤 공원까지 야유회를 가곤 한다. 김씨는 "과도한 음주로 이어지던 회식 자리가 많이 줄어들어 건강도 좋아지고 업무 능률도 오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회사 주변 산책로, 여기가 최고=기업마다 직원들이 애용하는 걷기 코스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서린동 SK 사옥 근처의 청계천로. 직원들은 바로 코앞의 청계광장에서 시작, 청계천을 따라 종로 방향으로 모전교.광통교를 지나 광교에서 돌아 오는 코스를 애용한다. 대략 30분쯤 걸린다. 시원한 물가에서 산란하러 올라온 물고기들의 활기찬 움직임까지 볼수 있는 환상적 코스다. 좀더 멀리 가는 사람은 아예 샌드위치나 김밥을 사서 청계3가 관수교까지 걸어갔다 오는 사람도 있다. SK 본사건물에는 SK㈜.SK인천정유.SK가스 임직원 등 2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점심 때 청계천을 걷는 사람 중 10~20%는 SK직원들이다.

CJ는 남산길을 자랑으로 여긴다. 봄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하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진다. 가을이면 길은 노란 은행잎 비를 맞을 수 있는 낭만적인 길이다. 남산 도서관 뒤의 공원까지만 갔다 오는 데 30분 가량 걸린다. 교육과학연구원을 중심으로 안중근기념관과 분수대가 있어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근처에 김구.이시영.정약용.이황의 동상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어 역사의 숨결도 되새길 수 있다.

현대.기아차그룹 직원들은 염곡천 뚝방길과 양재 시민의 숲을 애용한다. 양재동 본사 옆 농협하나로마트를 지나 청계산으로 향하는 뚝방길은 흙길을 밟으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 청계산을 한 눈에 보며 도시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발길을 본사에서 양재역 방향으로 돌리면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양재 시민의 숲이 있다. 4.8㎞에 달하는 산책로를 제대도 돌려면 점심시간만으론 모자란다. 여의도 LG그룹 직원들은 바로 길 건너 여의도 공원이 걷기엔 딱이다.

이현상.문병주.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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