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한미 FTA를 뒤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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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바이올린(바이올린 제 1주자)이라는 멋진 이름의 종마 한 마리가,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앞둔 한미간에 미묘한 불협화음을 빚어내고 있다. 심지어 양국간 정치적 쟁점으로도 번질 태세다.

건설사 대표인 소 모씨가 미국 켄터키주의 브룩데일 농장에 자신 소유의 이 종마를 팔기로 계약한 것은 지난달 6일. 계약 금액은 15만 달러(약 1억 4000만원).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혈액 검사 등 각종 테스트를 거치는 조건이다. 퍼스트 바이올린은 당초 소씨가 미국 켄터키주에서 6만달러에 사들인 1998년생 암말이다.

소씨는 한국인 에이전트를 통해 이 계약을 16일자로 취소했다. 이 말이 테스트를 통과해 미국행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 말의 실질적 소유주인 아내가 법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마의 값어치가 지나치게 저평가 됐다는 판단 때문이다. 계약을 취소한 뒤 소씨는 한국인 에이전트에게 "퍼스트 바이올린에 대해 잘 아는 국내외 마필 관련자들은 적정 가격을 1백만 달러로 본다'는 내용의 문건을 보냈다. 마사회 주변에서는 각종 테스트를 거치면서 이 종마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나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풍문이 파다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주마 대회인 켄터키 더비에 출전할 말을 생산할 수 있는 초우량 종마라는 것이다. 퍼스트 바이올린의 2세인 '도미니칸'은 18번을 달고 올해 켄터키 더비에 출전했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당한 브룩데일 농장의 소유주 프레드릭 J 자이츠가 세계 최대의 경주마 경매사인 켄터키 키니랜드사의 이사이자 미 민주당의 오랜 후원자라는 점이다. 그는 켄터키 주에 있는 스티츠앤하비슨사를 대리인으로 지정해 국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아예 해당 종마의 수입을 원천 봉쇄하겠다고 한국측에 통보해왔다. 그는 미 상하원을 움직이는 민주당 의원들을 동원해 다양한 경로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퍼스트 바이올린 매각 관련 문건 ; 이 문건이 계약서냐 아니면 단순한 구매 의향서냐가 종마 분쟁의 핵심이다.

국내 인사 가운데는 이 사안과 관련해 압력성 전화를 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 미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의 전화를 받은 국내 금융계 인사는 "한국 사람들은 계약서를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휴지 조각으로 여기느냐며 격앙된 어조로 말하더라"고 전했다. 힐러리 의원이 "이 사안이 한미 FTA 비준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민주당 의원들에게 회자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마주협회의 한 관계자는 미국인, 특히 유력한 켄터키 마주들이 종마에 대해 쏟는 각별한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파상 공세를 충분히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마주인 소씨의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는 "국제 시세에 걸맞지 않은 금액을 제시한 브룩데일 농장이나 한국인 에이전트의 행위는 사기 또는 기만이나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달 6일자로 체결된 계약서도 정식 계약이 아니라 구매의향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계약서 사진 참조).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계약은 원천 무효가 될 수도 있다.

북반구의 종마는 6월 이후에는 임신할 수 없다는 점과 미국으로 선적해 보내는 기간을 고려하면, 5월은 두 분쟁 당사자로서도 퍼스트 바이올린의 가치를 지킬 마지노선. 퍼스트 바이올린을 둘러싼 분쟁 역시 한미 FTA 협상처럼 막판에 극적 타협점을 찾을지 주목된다.

◆ 켄터키 더비=3만 마리에 달하는 미 전역의 경주마 중 최상위 20마리만 출전하는 꿈의 레이스. 벨몬트 대회, 프리크니스 대회와 함께 미국 3대 경마대회다. 이 가운데 켄터비 더비가 최고로 꼽힌다. 매년 5월 첫째 토요일에 열린다. 입장료는 40달러, 암표값이 5000달러에 이른다. 올해 133회 대회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관람했다. 우승 상금은 200만 달러. 우승마와 기수.마주는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다. 가장 힘이 좋은 세 살짜리 경주마들만 출전할 수 있다. 켄터키주는 블루그래스(칼슘이 많아 말 사료로 최적인 풀) 주산지여서 미국에서 말을 가장 많이 사육하는 곳이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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