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뜨거운「세계10대 출판 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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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 여름에「젊은 문화인의 발언」을 시리즈로 엮는다.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오늘의 현상을 직시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가다듬는 젊은 문화인들의 진지한 발언들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한줄기 신선한 바람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 주>
가끔 만나는 한 선배 출판인은「서양보다 앞선 금속활자 발명」「세계 10대 출판국가」라는 표현들이 낯뜨거워 출판관계 행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 같은 표현들은 오늘의 출판문화상황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출판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성찰을 담고 있다.
조상의 빛나는 업적은 후손들이 계승·발전시킬 때만 자랑할 수 있다.
우리 출판계가 세계10대출판국에 포함된다며 자랑하는, 지난해 2만2천 종이 넘었다는 발행 종 수를 보자. 일본·대만·한국에서만 특별히 번창하는 학습참고서류·아동도서·만화를 빼면 나머지 분야의 발행 종 수는 50%이하로 뚝 떨어진다. 이제는 이같이 터무니없는 발행 종 수를 내세워 출판선진국 행세를 하기보다는 출판문화의 질과 실속을 따져 보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솔직히「좋은 책」「꼭 필요한 책」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기보다 나쁘지만 않고 많이 팔릴 수 있는 책이 있다면 그것부터 만들어내려 하는 것이 해방이후 최대의 불황을 맞고 있다는 출판업자들의 오늘의 모습이다.
불황이 아니었을 때도 상황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우리·출판문화가, 얼굴의 반은 출판·서적인, 또는 저작자라는 이른바 문화인이면서 얼굴의 나머지 반은「책장사 꾼」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꾸려져 나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와 우리자신들의 관계를 냉정히 생각해보자.
수만 달러의 로열티를 선불하고 외국의 베스트셀러1종을 독점출판하면 바로 이어 수천만 원을 들여 각종 매체의 광고공간을 사들인다. 우리들이 무심코 매체들을 돌아보는 순간 그 책제목과 강렬한 인상은 우리들의 뇌리에 와서 꽂힌다.
어느 날 이름 있는 평론가가 그 책을 소재로 평론을 지면에 쓰고 주위의 몇 사람이 그 책을 화제삼아 이야기하면 일반 독자들은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책을 구입하게 되는 것이 오늘의 독서 풍토가 아닌가. 그 책임을 출판인들이 져야한다.
경제제일주의를 통해 힘들게 벌어들인 달러로 세계 수준의 출판시설들을 사들여 컬러 출판물들을 제작해내고 있다해서 우리의 출판계 수준이 높아졌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출판은 과연 줄기가 잘 뻗어 올라간 나무의 무성한「책 잎」과 같은가. 아니면 비정상적 교육과 오락이라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몇몇 출판분야의 가지들만이 호르몬 주사에 의해 이상비대증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돈이라는 열매만 무성하게 열린다면 악취나는 꽃을 피우더라도 국적도, 특성도 모르는 가지를 마구 잘라 접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속에서 우리의 시인들은 시로는 먹고 살 수 없으니 명성과 돈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대하소설을 쓰려하고, 소설가 또한 소설로 먹고사는 이는 20여명 안팎으로 대부분이 온갖 부업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풍부한 학술출판 지원 금, 잘 짜여진 도서관 제도, 표준화된 편집 자동화 시스팀, 우리의 3∼10배나 되는 비싼 정가 등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외국의 도서출판환경도 부러워만 할게 아니라 출판인들이 애써 만들어야 한다.
최장 5년 뒤로 예정된 출판시장개방을 앞둔 상태에서 국내의 많은 도서가 저작권법에 따른 표절시비에 말리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우리의 출판시장을 마구 공략해올 외국 거대 출판자본의 모습도 이미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우리 출판인들은 더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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