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리 270억 예금당일 전액빼내/「정보사땅 사기」예치금 인출경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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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른 계좌로 옮겨 멋대로 관리/윤 상무 통장 조작할때 「실수」도
정보사부지 사기사건과 관련,제일생명과 국민은행 사이에서 논란을 빚었던 2백30억원의 예치금 인출경위는 정건중·정영진·정명우씨 일당과 짠 국민은행 정덕현대리(37)가 도장을 도용하거나 위조,제일생명 윤성식상무(51) 몰래 치밀하게 돈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정 대리는 ▲윤 상무가 통장을 개설하며 맡긴 도장을 수십장의 빈 예금청구서에 몰래 찍어 사용하거나 ▲도장을 사전에 위조,예금원장에 찍은뒤 위조한 도장을 이용해 마음대로 돈을 인출할 수 있었다.
결국 통장과 도장을 갖고 있어 안심하고 있던 윤 상무는 거액이 빠져나간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 대리의 사기수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인출내용을 둘러싼 국민은행과 제일생명간의 주장이 다른 이유가 밝혀졌으며 국민은행이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면치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 대리의 사기수법을 간추려 본다.
윤 상무가 정씨 일당과 매매약정을 맺고 2백70억원을 맡기기 직전인 지난해 12월21일과 당일인 23일 정씨 일당은 국민은행 압구정서 지점과 석관지점에 정명우씨(55) 명의로 예금계좌를 개설,사전준비를 마쳤다.
윤 상무가 23일 정보사 매입예치금 2백70억원을 가지고 압구정서 지점에 찾아가자 정 대리는 윤 상무를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한뒤 건네받은 돈과 도장으로 윤 상무 명의의 예금통장을 만들며 빈 예금청구서 30여장에 윤 상무의 도장을 몰래 찍어두었다.
이 예금청구서를 이용,정 대리는 당일로 2백70억원 전액을 빼내 이중 2백50억원은 석관동 지점의 정씨 계좌로,9억6천6백만원은 같은 은행 정씨 계좌로 옮겨놓은 뒤 나머지 10억3천4백만원은 동생 정영진씨(31)에게 수표로 건네주었다.
따라서 돈을 맡긴 당일에 이미 윤 상무의 통장에는 한푼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윤 상무는 그러나 3일 뒤인 26일 정 대리를 찾아와 『가지급으로 회사에서 돈을 빼내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며 『1백50억원은 돌려주고 1백20억원은 회사명의로 된 새로운 통장에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정 대리는 석관동 지점의 정씨 계좌에서 2백50억원을 끌어다 1백50억원은 수표로 윤 상무에게 주고 나머지 1백억원에 H중공업에서 차용한 20억원을 보태 제일생명 명의의 새 통장을 만들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다급했던 정 대리는 윤 상무에게 압구정 서지점이 아닌 석관동지점 발행통장으로 만들어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윤 상무는 올 1월7일 계약이 성사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 통장이 엉뚱한 지점 앞으로 개설된 점을 수상히 여겨 1백20억원을 모두 빼냈다.
만약 여기서 윤 상무가 거래를 끊었다면 사기에 말려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그러나 예치금 전액인출 사실을 안 정 대리의 동생인 정영진씨가 즉시 윤 상무에게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다시 돈을 예치시켜라』고 요구,윤 상무는 당일인 7일 자신명의로 1백20억원,13일과 17일엔 하영기사장 명의로 1백억원,30억원 등 모두 2백50억원을 압구정 서지점에 예치시켰다.
이 예금과정에서 정 대리는 윤 상무가 계좌개설용으로 건네준 회사직인으로 통장을 만들었으나 예금원장엔 미리 위조한 「윤선식」,「하영기」명의의 도장을 찍고 가짜도장은 자신이 보관했다.
이때 정 대리는 윤 상무의 이름을 착각,「윤성식」이 아닌 「윤선식」으로 도장을 새기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은행의 예금담당 실무자의 경우 무통장 입출금이 가능한 점을 이용,정 대리는 보관중인 도장으로 2월13일까지 모든 돈을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윤 상무는 돈이 모두 빼돌려지기 전인 1월22일 『회사 자금사정이 악화돼 돈이 필요하다』며 20억원을 인출,제일생명이 피해본 돈은 2백30억이 됐다는 것.
윤 상무는 2월1일 국민은행 서초동 지점에서 예금잔액을 조회,돈이 사라져버린 것을 알고 항의하자 정 대리는 『사무착오』라고 변명한뒤 자신의 컴퓨터로 만든 가짜 통장 3개를 만들어줘 사기행각은 발각되지 않았다.
정 대리는 가짜통장을 발부해주며 돌려받은 통장에서 회사직인을 지우고 원장과 같은 가짜 도장을 찍어 자신의 통장처럼 마음대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수사 결과 치밀하기 짝이 없는 정 대리 역시 몇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먼저 진짜통장 첫머리에는 「첫거래 감사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통장발부 날짜가 찍혀야 하나 정 대리는 문구만 넣고 날짜는 빠뜨렸다는 것. 이 실수로 검찰은 윤 상무가 가지고 있던 통장이 가짜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또 정 대리가 컴퓨터로 만든 가짜통장으로 교환해줄 당시 이자를 잘못 계산,제일생명측이 『2백30억에 대한 이자가 너무 적다』고 의문을 제기해 정 대리는 모자란 이자를 채워넣기도 했다는 것이다.
윤 상무는 6월25일에서야 수상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국민은행측에 확인,비로소 자신의 통장 돈이 모두 증발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진술했다.
결국 도장과 통장을 모두 소지,아무런 탈이 없으리라고 믿었던 윤 상무는 사기조직에 가담한 은행대리의 지능적인 농간에 의해 어처구니 없이 당한 셈이라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그러나 예치금이 자신들도 모르게 입·출금 되고 있다는 수상한 기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통장과 도장만 갖고 있으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윤 상무측의 주장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있어 앞으로 분명하게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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