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행방 묘연… 비자금 의심/「땅사기」수사 핵심 은행예금의 정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6개월째 잔고없는 거짓 장부/너무 많은 계약금 관행벗어나
정보사땅 매매사건을 처음 터져나오게 만든 문제의 은행예금 2백30억원은 그 대부분이 이른바 「비자금」조성용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성 추정이 수사진전과 함께 갈수록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하 사장이 토지매입건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은 8일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는 ▲2월1일자로 제일생명측이 이미 컴퓨터를 통해 통장을 정리,예금잔고가 0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생명이 이후 국민은행 정 대리에게 수기로 된 가짜 예금잔액 증명과 개인용 컴퓨터로 찍은 가짜 예금통장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었다는 등의 사실도 하 사장이 알고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일생명측이 지난 6개월동안 실제로는 예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장부는 거짓으로 꾸며왔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 분명히 정치적인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일반의 의혹은 2백30억원의 자금이 어디로 흘러가 현재 실질적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를 수사당국이 낱낱이 밝혀내지 못하는한 쉽사리 가라앉지 않게 되었다.
금융계 인사나 기업의 경리담당자 등의 의견을 종합해 볼때 문제의 2백30억원중 상당액이 비자금일 것이라는 추정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출발한다.
우선 제일생명측이 무엇 때문에 6개월씩이나 사실상 있지도 않은 은행예금에 대한 가짜장부를 만들어 왔는지가 상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보험감독원이 정기검사를 나가 제일생명의 자산 운용상태를 점검한다 하더라도 회사장부를 거래은행의 예금원장과 일일이 대조해 보지 않는한 제일생명이 현금을 다른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는 없다. 또 수기로 쓴 예금잔액증명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은총재를 지낸 하 사장이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보험사가 사장의 묵인하에 감독당국을 속이면서 반년씩이나 비정상적인 자금운용을 해왔다는 사실은 자금의 용처가 어디였든간에 명백히 비자금의 냄새가 물씬풍기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토지매매를 위한 계약금치고는 2백30억원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도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토지매매를 위한 계약금은 전체 매매금액의 10% 수준이라는 것이 부동산 거래의 상식이다.
그러나 제일생명이 계약금조로 지불한 2백30억원은(이는 지난해 12월23일에 작성된 매매약정서나 올 4월에 작성된 매매계약서에 나타나 있다) 매매금액 6백30억원의 36.5%나 된다. 따라서 2백30억원 전체를 단순한 계약금으로 보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 기업부동산 담당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다시 말해 2백30억원의 일부는 실제로 토지매매를 위한 계약금으로 지불되었겠으나 이중 상당부분은 비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실제로 김영호씨 등이 받았다는 돈의 상당부분은 이 비자금에서 나갔을 것으로 보는 것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 경우 당연히 따라붙는 의문은 김영호씨 등을 통해 흘러간 돈의 최종 「임자」가 누구였겠느냐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받은 돈의 상당부분을 원래 임자에게 이미 돌려주었다』는 김영호씨의 진술은 주목할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 6백30억원이라는 땅값 자체도 주변 땅값과 비교해 볼때 지나치게 비싼 금액이라든가,당장 명의이전이 안되는 부동산 물건에 대해 계약서를 작성하고 이에 대해 거액의 계약금을 지불하기까지 했다든가,또 제일생명이 평소 거래하던 은행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정하는 은행을 이용했다는 사실 등이 다 정상적인 거래관행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은행감독원이나 수사당국이 수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명계좌」다. 가명계좌란 사실상의 돈 임자가 감춰져있다는 것이며,따라서 누구라도 『이것은 사실상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통장과 도장을 들고 나서기만 하면 더 이상의 추적은 끊기고 마는 취약점이 있다.
이번 일에 정치적인 배후가 있었고 실제로 일이 추진되다가 도중에 뭔가 일이 잘못되자 덮으려 했으나 허공에 뜬 2백30억원은 어찌 할 수가 없어 도리 없이 사건화시킨 것이라는 것이 일반의 그럴듯한 「시나리오」다.
결국 이 사건의 첫번째 열쇠는 바로 비자금의 의심을 받고 있는 2백30억원이 과연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를 낱낱이 가려내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김수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