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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박·은박 장식된 배 … 화려한 문물에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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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본격적인 육로는 오사카에서도 30~40㎞ 정도 하천을 거슬러 올라간 요도(지금의 교토 후시미구)에서 시작되지만 풍랑을 헤치고 난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험한 바닷길은 일단 끝난 것이다.

오사카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의 부사(副使) 경섬은 기행문에 "성곽이 겹겹이 쌓이고 누각이 층층으로 올려졌으며(중략) … 가마로 4~5리쯤 가니 여염집과 관아 건물이 사방에 있더라. 남녀노소가 앞다퉈 모여들어 거리를 메우니 떠드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했다"라고 썼다.

조선통신사가 오사카에 갈 때마다 숙소로 사용했던 니시혼간지. 에도 시대에 몇 차례 화재로 개축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소돼 지금의 건물은 1963년 콘크리트로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에 1000여 명이 묵을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 예상보다 화려함에 놀라=오사카는 통신사 일행이 처음 접하는 일본의 대도시였다. 오사카 이전에 묵은 곳은 쓰시마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일대의 어촌들로 교통의 중심지라고는 해도 모두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오사카는 17세기 때 이미 인구 30만 명을 넘어섰으며 상업이 발달해 물건도 풍족했다.

통신사들은 화려하고 번화한 대도시와 다양한 풍물을 접하면서 내심 매우 놀랐다. 오사카에 도착한 일행들은 우선 배를 갈아타야 했다. 당시 오사카의 해안선은 요도가와(淀川)와 그 지류가 얽혀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하천이 정비된 지금보다 훨씬 복잡했다. 통신사 일행이 부산부터 타고 온 큰 배로는 얕은 하천을 항해할 수 없어 일본 측이 준비한 작은 배로 바꿔 탔다.

가와고자부네(川御座船)라고 부른 이 배의 누각은 다양한 색채의 문양과 금박.은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는데 너무 호화로워 통신사 일행이 처음엔 타기 주저할 정도였다. 1719년 통신사의 정사(正使)였던 홍치중은 안내를 맡은 쓰시마 번주(藩主)에게 "배의 사치스러움이 도에 지나치다. 만약 이것이 관백(關白.에도의 장군을 뜻함)이 타는 것이라면 사신으로서 감히 탈 수 없다"고 사양하기까지 했다.

막부에서 준비한 네 척의 배에 조선 임금이 전하는 국서를 따로 실어 앞세우고 정사.부사.종사관 등 통신사 고위 관리들이 차례로 탔다. 그 외 일행이 타는 배를 포함해 9~14척의 가와고자부네가 열을 짓고 수많은 작은 배가 이를 호위했다. 일정이 급해 밤 늦게 배를 띄울 경우 하천 양쪽에 초롱과 횃불이 켜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통신사의 선단은 요도가와를 거슬러 올라가다 숙소였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가까운 나루에 정박했다. 일행이 배에서 내려 숙소로 향했던 길은 지금도 오사카에서 가장 큰 대로이자 금융.경제 중심지인 미도스지(御堂筋)다.

숙소로 사용된 절은 정식 명칭이 혼간지 쓰무라별원으로 12차례 통신사 중 11차례를 이용했는데 교통 요지에 위치한 데다 규모가 컸던 것이 이유였다. 기록에는 수백 명의 통신사 일행은 물론 이들을 수행한 대마도의 관리와 오사카 측의 접대 관리 등 1000명 이상이 모두 한 곳에 묵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이 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물은 1963년 콘크리트로 다시 지은 것이다.

◆ "겉은 화려해도 시문은 형편없더라"=통신사 일행은 오사카의 화려한 문물에 충격을 받았지만 한 나라의 사절단으로서 이를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왜란을 거치며 일본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채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곱게 평가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신사의 기록 중에는 오사카.교토.에도 등 대도시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 화려함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칭찬하면서도, 이런 부귀영화가 '오랑캐'들에게 돌아갔다며 개탄하는 서술이 유난히 많다.

또 상대적으로 일본이 물질적 부가 넘치고 무(武)를 숭상하는 나라지만 조선시대 지식인이 중시했던 유학에 기초한 예절이나 지식을 나타내는 시문(詩文)의 수준은 형편없다는 평가도 많이 나타난다.

신유한은 오사카와 교토를 둘러보고 "누각을 보니 금.은의 휘황찬란함이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화려한 배를 타고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는 일본인을 보며 "아깝다. 부귀영화가 잘못돼 이런 흙으로 빚은 꼭두각시 같은 자들에게 돌아가다니…"하며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기 통신사로 갈수록 일본의 문물을 있는 그대로 보며 참고할 만한 것을 연구하는 모습이 점차 늘어난다. 1764년 통신사의 정사 조엄은 일본에서 흉작 때의 식량 보급을 위해 고구마 종자를 들여왔다. 또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길에서 본 정교한 수차(水車.물레방아)가 식수나 농업용수 보급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세히 연구해 고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일본 학자.문인들 문전성시 "새벽닭이 울 때까지 못 자"

통신사 일행의 문화교류의 양과 질은 대도시 오사카를 기점으로 더욱 풍성해졌다.

일행은 오사카에서 보통 6~7일을 묵었는데 지금까지 뱃길에 들렀던 마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학자.문인이 몰려들었다.

이전의 숙박지에서는 그 마을이나 도시가 속한 번(藩)이 대접을 맡았다. 각 번은 많은 재물을 들여 통신사들을 대접한 만큼 반대 급부로 자기 번 소속의 문인.학자들만 통신사를 만나게 했기 때문에 사람의 수가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는 에도 막부가 직접 다스리던 곳이어서 이런 제한이 없었다. 게다가 경제 중심지였던 당시 오사카는 일본 사회에서 급속히 성장해 큰 부를 쌓은 상인계급인 조닌(町人)들이 문화 분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들로서는 당시 유학과 시문(詩文).그림.서예 등에서 탁월한 통신사와 만나는 것이 문화에 대한 식견을 높여줄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통신사가 일본을 찾은 것은 200여 년간 12차례에 불과한 만큼 수십 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통신사와의 만남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신유한이 참여한 1719년 통신사의 경우 일본 측 외교사절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州)가 시문에 자문을 구하려는 이들을 제한했다. 그랬더니 정식 방문객이 아닌 통역이나 심부름꾼을 통해 시문을 보이는 이들이 쇄도했다. 신유한은 기행문 '해유록'에 "오사카는 글을 구하려는 자들이 다른 곳보다 두 배는 많다. 때로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자지 못하는가 하면 식사를 하다 입에 들어 있는 것을 뱉어내고 응해야 하니…"라고 적었다. 그는 응답해 줘야 할 시문이 쌓여 아무리 고민해도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호소하기도 했다.

병 걸려 죽고 살해당하고… 고난의 행보

오사카 지쿠린지의 주지 호사카 마사아키가 1764년 통신사로 왔다가 병을 얻어 이 절에서 숨진 김한중의 묘비를 설명하고 있다.

400~500명이 바닷길로 반년 이상 걸려 다녀오는 통신사들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거센 풍랑으로 배가 부서지는 일이 잦았다. 첫 통신사부터 뱃바닥이 갈라져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는 기록이 있다. 1748년에는 배에 불이 나 3명이 죽고, 많은 예물이 타 버렸다. 통신사 일행의 단속도 골칫거리였다. 자칫 크고 작은 사고라도 치면 외교사절로서 큰 망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책임지는 정사(正使)는 결코 달갑지 않은 자리였다. 특히 당시 중국에 다녀오는 연행사와 비교할 때 '고위험 저수익' 구조였다. 연행사가 육로를 이용했던 반면 통신사는 위험한 뱃길을 이용하는 구간이 많았다. 또 연행사는 중국에서 귀중한 책자와 문물을 구해올 수 있었으나 통신사는 그렇지 못했다.

1764년 통신사의 정사 조엄은 그 어려운 임무를 "분함을 참고 또 참는다. 그만두려야 그만둘 수도 없다"고 표현했다. 동래부사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 대일 외교에 익숙했던 조엄은 일행들에게 일본인을 업신여기거나 비웃지 말고, 물건을 줄 때는 후하게 주고 받을 때는 적게 받도록 지시하며 일행 단속에 각별히 신경 썼다.

그러나 이때 사망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먼저 에도(江戶)를 가던 길에 오사카를 앞두고 많은 이들이 병을 얻었다. 그중 김한중은 병이 깊어 오사카의 한 절에서 요양했으나 1764년 2월 10일 22세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뒀다. 지쿠린지의 호사카 마사아키(保阪正昭) 주지는 "당시 주지가 이국 땅에서 숨진 그를 위해 묘비를 세웠다"며 "이 묘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공습으로 절의 대부분이 불타는 와중에도 다행히 파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 오사카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경상도의 관리로 도훈도(규율을 담당하는 중급 관리)였던 최천종(崔天宗)이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는 1764년 4월 7일 새벽 숙소에서 대마번의 관리 스즈키 덴조의 칼에 찔려 숨졌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 일본 측은 말다툼 끝의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우리 측은 스즈키가 통신사 일행의 물건을 훔치려다 들키자 저지른 범죄라고 따졌다. 이 사건은 도주했던 스즈키가 잡혀 처형당하는 것으로 종결됐으나 우호의 상징인 12차례의 사절단 중 유일한 살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 특별취재팀 = 박소영.이승녕(국제부문).김태성(영상부문) 기자, 예영준.김현기 도쿄 특파원

◆ 도움말 =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 나카오 히로시(中尾宏) 교토 조형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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